배기원 대흥영화사 감독 |
정말 믿기지 않았다. 공공기관의 심사현장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자리는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제작지원금을 받으려는 참가자들이 심사를 받는 곳이었는데 필자도 발표자로 참여하여 프로젝트를 설명하던 참이었다. 이런 황당한 경험도 처음이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로 정리를 해두려고 한다.
준비했던 발표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심사위원 한 사람이 질문할 것이 많다며 말을 건넸다. 가운데 앉은 걸로 봐선 심사위원장인 듯 싶었다. 표정과 말투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독소를 품은 내용이 전달되고 있었다. 골자는 이렇다.
- 단편도 아니고 장편인데 전반적인 내러티브를 봐야 하고 대사 등 고려할 부분이 많다.
-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나리오가 있으면 좋을텐데 없어서 아쉽다.
이번 지원사업은 장편영화를 제작지원하는 것인데 시나리오 제출 의무사항은 없었다. 단지 '(해당시) 시나리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사업에 지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시나리오 없이 어떻게 심사를 진행하지?'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시나리오가 필수사항이 아니라서 제출서류만 챙겨서 접수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모인 발표 자리에서 들은 첫 마디가 '시나리오가 없어서 당신의 작품이 어떤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마치 발표자인 필자를 생각해주는 것처럼 당신의 작품을 더 이해하고 싶지만 시나리오가 없어서 아쉽다는 뉘앙스로 말했지만 그런 말은 절대적으로 불필요하다. 심사위원이 발표자를 생각해 줄 필요도 없을뿐더러 반대로 점수를 깎아버릴 목적으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더더욱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심사위원은 '클라이언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영화제작비를 타내기 위해 왔으면 클라이언트에게 설명을 상세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사용한 단어다. 그 심사위원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클라이언트라는 단어는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없거나 혹은 예술가들을 명백하게 을로 바라보는 갑의 위치에서 비롯된 단어이며 발표자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심사위원에 그것도 심사위원장 자리에 앉혀놓고 발표자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건네게 한단 말인가!
정말 궁금하다. 인생을 걸고 영화를 만드는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그 자리에서 그렇게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왜 그랬을까. 코웃음 치며 필자에게 치명타를 던져버린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모든 심사가 끝나고 결국 제작지원금을 받는데 실패했지만 결과에는 아무 불만이 없다. 그런 발표 분위기에서 제작지원작에 뽑힌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말하고 싶은 세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은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하기 바란다.
비공개원칙이라며 숨기고 있는 명단을 공개하길 바란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심사받는 것은 원산지 모르는 농산물과 같다. 진흥원 직원들이라면 그런 농산물을 먹을 것인가?
둘째, 지원사업의 심사 후에는 심사평을 작성하기 바란다.
적어도 심사위원들이 그 작품을 왜 뽑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전주와 인천 등 다른 시도 기관에서는 심사위원 명단과 함께 심사평이 꼭 달려있다. 대전은 왜 그런 심사평이 없는가. 그렇게 불투명하게 발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참고적으로 아래 자료를 보면 대전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명백해진다.
셋째, 자격 미달의 심사위원은 풀에서 제외하기 바란다.
심사에 불필요한 말을 하고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하는 심사위원은 다른 목적을 갖고 심사에 참여했거나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작품의 질을 높이고 싶으면 심사위원 풀을 정비하기 바란다.
이상의 세 가지 내용을 대전정보산업진흥원은 대전 영화 발전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저 형식적인 업무가 아닌 진정성 있는 태도로 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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