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태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
자연, 생명, 건강을 뜻하는 녹색의 신록이 한창이건만 지구촌은 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피부색에 따른 미국의 흑백 갈등은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인종차별 반대를 위해 지난달 스페인 국영 우편회사가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1주기와 '유럽 다양성의 달'을 기념해 선보인 '피부색' 우표가 논란의 불을 지폈다. 제일 밝은 색 우표는 1.6유로, 색이 진할수록 1.5유로, 0.8유로로 가격이 내려갔고 검은색 우표는 0.7유로로 가장 낮았다. 색상별로 차등화한 가격이 오히려 인종차별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유럽에서는 코로나19가 중국에서 발원됐다며 아시아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외집단 동질성 효과(outgroup homogeneity effect)'로 우리가 서양 사람들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 동양인들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한 탓으로 생각된다. 지금 상황은 청일전쟁 말기 189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창한 황색인종 억압론, 즉 황화론(黃禍論)이 코로나19 장기화와 함께 재등장해 동양인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찍어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색깔은 종종 개인적 취향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사회적 코드로 기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란색 중에서 '브라질 노란색'은 태양빛과 브라질 축구의 열정을 상징하지만 '중국 노란색'은 황토색 대지를 표상한다. 중세시대에 노랑은 멸시받는 계층의 색이었다. 창녀는 노란 머릿수건이나 노란 망토, 노란 구두끈을 사용해야 했다. 처형장에서 이교도의 목에 노란 십자가를 걸었고, 유대인은 노란 모자를 쓰거나 옷에 노란 고리를 달고 다녀야만 했다.
색은 경제적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1939년 작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디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던 당시 사회상을 풍자한 동화이자 은본위제를 대중에 널리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도로시가 불가사의한 은색 구두의 힘으로 금을 상징하는 노란 벽돌 길을 따라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는 끝 부분은 작가가 은본위제 개혁을 지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영화에선 은색 구두가 화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감독의 판단에 따라 붉은색 구두로 바뀌었다).
색과 영화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영화 속 영웅들은 각자 고유의 색깔이 있다. 슈퍼맨은 파란색 옷과 붉은 망토, 배트맨과 매트릭스의 네오는 검은색 옷, 터미네이터는 검은색 가죽점퍼, 스파이더맨은 빨강과 파랑이 어울린 옷을 입는다.
색상을 둘러싼 저작권 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높은 굽과 빨간색 구두 밑창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루부탱은 2011년 입생로랑이 신발 밑창과 깔창에 빨간색을 넣자 상표권 침해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크리스찬 루부탱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 사건은 색이 브랜드의 로고처럼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대통령 선거와 지방 선거가 있는 내년은 대한민국으로선 매우 중요한 해이다. 그동안 사례를 보면 선거철에는 국민을 위한 정책 대결보다는 각종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터무니없는 가설에 근사한 색을 덧칠해 표현하는 기술을 가진 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그 가설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뭔가에 '근사한 색'이 칠해져 있다면 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 속에 터무니없는 흉계가 숨어 있지 않은지 모든 지력을 총동원해 간파할 필요가 있다./김용태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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