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배 교수 |
그는 서얼 출신 오언관과 절친하여 아내와 함께 셋이 모여 불경을 공부했다. 김자겸은 부인에게 아내의 도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불경을 함께 공부하는 도우로 대우했다. 그들은 골육처럼 격의없이 지내면서 때로는 한 방에서 함께 밤새우며 불경을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남녀유별의 유교적 윤리관으로 볼 때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김자겸은 평소에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건강이 점차 악화돼 임종을 앞둔 그가 오언관에게 '아내가 있으니 나는 죽지 않았다'면서 계속 왕래하며 불도를 닦으라고 부탁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이여순에게는 의지할 자식도 없어 불경 공부에만 뜻을 뒀다. 마침 유람을 떠나는 오언관을 따라 안음의 덕유산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사람들의 신고로 인해 붙잡혀 와서 국문을 당했다.
이여순은 광해군에게 국문을 당하면서 자신이 전혀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당시 심문 기록에 의하면 이여순은 6~7세부터 이미 한문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세상에 나가 포부를 펼칠 수 없었기에 한계를 자각하고는 미련을 접었다. 그래서 유학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부부생활이나 자식을 두는 일도 포기하였던 것이다. 대신 불경에 심취하여 남편을 잃은 상황에서 승려가 되려고 입산했다가 이런 화를 당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이여순은 남동생에게 오언절구 1수를 보냈다. 여기엔 세상 밖에서 노닐며 인간의 욕망을 초탈한 그녀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조정 대신들은 사족의 아녀자로서 정절을 잃어 음욕을 자행했다는 죄명으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오언관은 장살당하고 이여순은 우여곡절 속에 감옥에서 풀려나 승려로서 생활했다. 한문을 이해하고 불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불도의 수행에 정진했으므로 사람들은 생불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여순은 자아의식이 조선 시대 보기 드물게 매우 강한 여성이었다. 여성은 세상에 나가 뜻을 펼 길이 없자 불교로 귀의한 것도 자신의 선택이었다. 남편 김자겸도 그런 아내의 뜻을 잘 이해하고 오언관과 함께 당시 유교의 통념을 뛰어넘어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했던 것이다. 현재의 시각으로도 그들의 행동을 보면 얼마든지 불륜으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여순이 그런 오해를 불사하면서까지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대담한 용기가 돋보인다.
사실 전통사회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여성이 사회적으로 핍박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주체적인 삶보다는 한 남성의 아내로서 자녀의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강조됐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활동하기에는 여러모로 불리한 여건이 많았다. 남녀 차별적인 요소를 해결하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신장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 페미다.
요즘 이 페미에 대한 역차별을 주장하며 안티페미들이 등장하였다. 페미와 안티페미의 갈등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출산의 고통을 아느냐고 말하고 남성들은 여성들도 군대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립한다. 건전하게 불평등 요소를 이해와 토론을 통해 개선하여 상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망은 남녀노소가 같다. 누구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것의 실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부터 이성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버리고 이해와 배려심을 확장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은 시기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며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할 존재다. 우리는 다 함께 평등한 사회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이해와 배려를 통해 행동해야 한다.
만약에 김자겸의 이해와 배려심이 없었다면 이여순이 저렇게 자아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또한 이여순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김자겸의 배려와 이해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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