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소장 |
문득 30여 년 전 미국 유학 시절이 떠오른다. 바쁜 와중에도 주말에는 꼭 DVD 영화 한두 편은 봐야만 다음 한 주를 견뎌낼 수 있었다. 당시에 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는 이들이 주연한 영화라면 따지지도 않고 볼 정도로 좋은 영화에 많이 출연했었다. 이제는 유튜브 등에 볼거리가 다양해졌고, 선택의 폭도 넓어졌지만, 여전히 그들의 영화는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배우는 영화와 같은 삶을 산다고 했던가. 로빈 윌리엄스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처럼 사람들을 일깨우는 좋은 영화를 많이 남겼지만, 우울증과 치매로 고생하다가 영화 속 제자 닐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에 로버트 드니로는 2020년도 오스카상을 놓고 기생충과 경쟁한 아이리시맨에 출연하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드니로는 2015년 72세 나이에 출연한 영화 '인턴'에서의 멋진 주인공 벤이 정말 그의 삶인 것처럼 느껴지는 매력적인 배우다. 영화에서 70세 벤은 30세 여성 CEO 줄스가 운영하는 온라인 패션몰 회사의 시니어인턴 프로그램에 합격해서 줄스의 개인 인턴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줄스는 처음엔 벤을 탐탁지 않아 하지만, 벤의 연륜에서 나온 노하우와 지혜로 어려움을 여러 번 극복하면서 그와 절친이 되고, 남편의 외도와 회사의 위기를 극복한다.
어찌 보면 평범할 것 같은 스토리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줄스의 패션몰 회사 건물이 과거 벤이 부사장까지 오르며 40년간 근무했던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회사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나라면 젊은 시절의 애환이 깃든 그곳에서 사회 초년병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부담된다고 아무도 일을 주지 않는데,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을까? 여러 면에서 영화 인턴은 커리어맨이 은퇴 후에 어떻게 살아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지 교과서 같은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은 은퇴하면 여행도 하고 취미 생활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내지, 왜 힘들게 또 일하려 하냐고 묻기 쉽다. 그러다가 막상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은퇴 후 삶으로 모드를 전환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사람이니까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잃는 순간 존재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은퇴하면 새로운 일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쉽지 않으니 익숙한 것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집착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무너지기 쉽다. 나도 모르게 발휘되던 내가 속한 조직이나 기관의 힘과 보호막은 퇴직과 동시에 사라진다. 더 크고 힘센 기관에 속해 있었을수록 더 큰 상실감을 느끼고, 혼자 서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은퇴 후 펼쳐질 인생 2막은 이처럼 그동안 축적한 경력자산과 기관의 보살핌으로부터 홀로서기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2막에서는 1막에서 이룬 것이 사라져버려 힘들 수도 있으나, 어찌 보면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 새로 시작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인생 2막에서는 1막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한 새 도화지가 각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자그마한 설렘을 다시 느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낙담하지 말고 흥분도 하지 말자. 눈을 감고 긴 호흡을 느껴보자. 흐르는 시간과 변하는 환경에 과거의 나를 흘려보내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읊조려 본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굴러간다. 그것도 잘.
지금부터는 내가 굴릴 세상, 내가 필요한 작은 세상을 찾아 나서야 한다. 혹시 그런 세상이 없어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내가 꿈꾸는 작은 세상을 내가 만들면 되니까. 황량한 들판에 이제 갓 던져진 나는 막 허물을 벗은 곤충처럼 연약하지만, 힘차게 날갯짓할 준비가 되어있다. 자 떠나자 내 마음의 동해바다로.
/양성광 혁신과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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