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18세기가 문예부흥기라 하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기꺼이 문화예술을 즐겼음은 물론, 뒷날의 그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정 부류가 향유 하던 문화예술이 보편화 된다. 경제적으로 다소 넉넉해진 중인들의 참여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본래 신분에 관계없이 운치 있고 풍치를 즐기던 민족 아닌가? 막걸리 한잔에 온종일 신명낼 수 있는 특별한 민족이다. 멋스럽게 노는 풍류가 가득하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자연스러워 너나없이 즐긴다. 일상생활에서도 아름다움, 멋스러움, 고상함을 즐기려는 속성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축제는 그러한 것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치, 타락, 부패 등과 친밀하다는 사실이다. 이웃사촌이랄까, 호불호가 백지장 차이다. 경계가 명확할 수 없다. 동반자처럼 늘 곁에 있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란 말이 지금도 회자된다. 조선시대 평양감사는 왜 벼슬아치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까? 지위뿐 아니라 누리는 혜택과 특권이 많고 재물도 쌓였던 까닭이리라. 그런 호사는 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평양감사가 부임하면 축하연이 열렸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있었던 모양이다. 김홍도의 '평양감사향연도'에 의하면 맨 먼저 부벽루에서 열리고, 연광정, 부벽루에서 차례로 연회가 펼쳐진다. 부벽루에서 열릴 때는 밤이다. 환하게 횃불 밝히고 대동강에서 뱃놀이 한다. 뱃놀이 모습 그린 것이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종이에 채색, 71.2 × 196.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그림을 보자.
지금 보아도 장관이다. 평양성 대동문 앞이다. 가운데의 가장 커다란 평저선 뒤쪽에 감사가 앉아 있다. 앉은 자리 앞에는 한 무리 여인이 있고, 뱃전에서는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며, 뒤쪽으로 다양한 사람이 옮겨 타고 있다. 배 뒤쪽에는 공연자로 보이는 예인들이 탄 여러 척의 배가 있다. 빙 둘러선 배에는 군관과 군졸이 호위하고 있으며, 그 밖으로 늘어선 수십 척의 배에 서고 앉은 사람과 강과 성 사이, 성위의 수많은 사람이 감사 일행을 주시하고 있다. 성곽 위에 횃불이 빼곡히 꽂혀있고, 성벽 앞쪽에도 여기저기 횃불 치켜든 사람이 보인다.
아래쪽에도 백사장의 횃불 든 사람과 구경꾼 모습이 자유분방하다. 자세히 분석해 놓은 책이 있다. 이영훈 저 '조선시대생활사 3'에 의하면, 그림 아래쪽 백사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224명이다. 모두 일반인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신분까지도 조사해 놓았다. 갓(黑笠) 쓴 사람이 45명, 벙거지(氈笠) 쓴 사람이 20명, 초립(草笠) 쓴 사람이 3명, 삿갓(方笠) 쓴 사람이 2명, 두건(頭巾) 쓴 사람이 1명, 맨상투머리가 39명, 여성 6명, 댕기머리 총각 81명, 더벅머리 어린아이 27명이다.
월야선유도 |
월야선유도 부분 |
낙관 등 근거가 없어 단정하지 못하나 김홍도(金弘道) 작으로 전한다. 김홍도는 익히 아는바와 같이 문예부흥기인 영?정조 시대 주로 활동한 화원이다. 어떤 그림이든지 이야기가 가득하다. 인물이나 사물이 작아도 저마다 나름의 이야기를 담았다. 놀라운 순간 포착이요, 표현력이다.
세 폭의 그림을 보자면 연회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부정부패의 생생한 현장이다. 한 사람 즐겁게 하자고 백성을 동원하고 엄청난 재정을 민관이 부담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에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것 같다. '부벽루연회도'에는 쟁기질 하고 괭이질 하는 농부 모습을 배치하였다.
축제뿐인가? 매사가 더불어 즐기자는 것이지 특정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모를 리도 없다. 단지, 가까이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옆길로 새는 것뿐이다. 때로는 아름다움도 집착하면 고해가 되며, 잘못된 신념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이 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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