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 長(긴 장/어른 장/오래 장) 毋(말 무/~하지 말라) 相(서로 상) 忘(잊을 망)
출처는 중국 섬서성(陝西省)에서 출토된 오래된 와당(瓦當)에 새겨진 말이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秋史 金正喜 歲寒圖)에 찍혀진 낙관의 글귀이다.
비유로는 '당신의 고마움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추사 김정희는 본이 경주다. 경주 김씨(金氏)는 영조 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집안으로 세도를 부렸으나 정조 이후 등장한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밀려난 집안이다. 그러나 김정희가 과거에 급제할 때만 해도 조정에서 축하를 보내올 만큼 위세 높은 가문이었다.
김정희 역시 젊어서부터 천재(天才)소리를 들었으며 총명한 만큼이나 지적인 욕구에 그득한 사람이었다. 이미 10대 때 북학파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어 스승이 교유한다는 청나라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을 키우던 그의 간절한 꿈은 청나라에 들어가 스승 박제가처럼 쟁쟁한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북경(北京)을 가 보고 싶어 하던 김정희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이 청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뽑힌 것이다. 김정희는 사신 수행원으로 자원하여 압록강을 넘는다.(1809) 그때 김정희 나이 24살이었다.
북경은 완전히 신천지였다. 성리학에 사로잡혀 행여 다른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사문난적(斯文亂賊/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였던 조선 선비 사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았다.
우선 김정희는 청나라 당대의 대학자 완원(阮元)과 사제관계를 맺는다.
김정희의 호는 72가지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완당(阮黨)이라는 호는 완원의 제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또 당시 금석학의 1인자였던 옹방강(翁方綱)의 초대를 받아 그가 모으고 보유했던 진귀한 자료를 직접 대면했을 때 김정희는 그야말로 새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중심 학문은 옛 문헌의 정밀한 고증을 지상과제로 삼는 고증학(考證學)이었던 바, 김정희가 보내온 탁본은 대단한 화제를 모았고 김정희는 일약 청나라에서 그 이름을 드날리는 몇 안 되는 조선 사람이 된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김정희는 서른네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추사 나이 마흔다섯에 결정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윤상도라는 이의 옥사에 아버지 김노경이 연루돼 고금도로 유배된 것이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지는 충격이었고,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곧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김정희에 대한 임금의 신뢰는 여전히 높아서 나이 쉰네 살에 다시 중국에 사신으로 갈 기회를 얻는다. 이때 김정희의 가슴은 또 한 번 용솟음 쳤다.
그러나 북경행을 기다리던 그에게 뜻밖에도 10년 전 아버지를 옭아맸던 윤상도 사건의 책임론이 또 다시 불거지면서 김정희는 제주로의 귀양길에 오르고 만 것이다. 드넓은 세상 북경은커녕 제주도에서도 가장 험한 고장이라는 대정(大靜)에서 김정희는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세도 가문에서 자라 탄탄대로를 걸었던 김정희에게 귀양살이는 큰 고통이었다.
입도 까다로웠는지 먼 귀양지로 음식을 보내 달라고 통사정하는 편지를 집에 보내곤 했고. 귀양지의 불편한 잠자리, 타지 사람들에 대한 토착민들의 텃세,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김정희를 괴롭힌 것은 고립감이었다.
귀양 온지 몇 해가 흘러 1843년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포구로 배가 들어왔는데 김정희에게로 짐이 부쳐져 왔다는 것이다. 몸을 일으켜 짐꾼들을 맞은 김정희의 눈은 커지고 언성은 떨려 나왔다.
"아니 이게 무엇인가." 짐은 모두 책이었다. 책을 보낸 이는 호(號)가 우선(藕船)이며 자기 문하(門下)의 우수한 역관(譯官)인 이상적(李尙迪)이었다.
그런데 그 책은 추사가 오래 전부터 반드시 보고 싶어 했던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庫)였다. 추사는 이 책들을 구하기 위해 스승으로 섬겼던 청나라 학자 완원의 아들에게까지 기별하여 간청했으나 구하기 어렵다는 회답에 실망을 금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귀중한 책들이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조선 땅 삼천리를 가로지르고 거친 파도를 넘어 제주도에서도 가장 험하다는 대정 땅 귀양지에 보라는 듯 도착한 것이다.
이상적만이 줄 수 있었던 선물이었다. 추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책들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서 제자이자 문우(文友)라 할 이상적과의 추억이 뜨겁게 묻어났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고 하셨다. 송(松), 백(栢)은 사계절 잎이 지지 않는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푸름을 간직한 소나무와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푸른 절개를 변치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는 탄생된다.
비록 만물이 숨을 죽이고 흰 눈이 세상을 덮은 겨울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의 한쪽에서 푸름을 잃지 않으리라는 선비로서, 귀양객으로서, 그리고 자존심 드높은 지식인으로서의 결의가 세한도(歲寒圖)에는 담겨 있었다. 메마른 둥치를 드러낸 세 그루 소나무에 둘러싸인 초라한 집 한 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도 변함없이 꼿꼿한 모습으로 작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김정희를 끝까지 지켜 주며 북경에서 귀한 책까지 구해 준 제자 이상적을 이 소나무들에 비유했다고 한다.
즉 세한도의 주인공은 이상적(李尙迪)이면서 김정희(金正喜)였다. 세한도를 창조한 것은 김정희였으나 그 원천을 제공한 것은 이상적이었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만큼 김정희는 자신을 가지런히 가다듬었다. 이상적의 배려와 김정희의 감응이 희대의 걸작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윽고 김정희는 왼쪽 하단에 붉은색 인장인 장무상망(長毋想忘)의 낙관을 찍는다.
"오랫동안 잊지 마세나." '당신의 고마움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이 그림(세한도)을 받아본 제자 이상적은 어떠하였는가?
바다를 건너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한 장의 종이, 그에 담긴 글과 그림 앞에서 이상적은 몸부림을 치며 울며 감격한다. 그리고 그는 답신을 보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과연 역사에 남을 스승과 제자로서의 도리가 우리의 마음을 환희로 넘치게 한다.
스승과 제자로서, 은인으로 또는 선. 후배로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장무상망(長毋相忘)'의 뜨거운 존경과 우정을 잊으면 안 되겠다.
이 나라 모든 스승과 제자들에게 권하며 사제(師弟)의 법도마저 무너져가는 이 혼탁한 배움의 환경에서 한 점의 찬란한 보석(寶石)을 바라보며 스승의 날에 붙여 본다.
장상현/ 인문학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