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숙 공주여중 교사 |
"상록원은 우리의 청춘이야."
선생님들은 어린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공주의 사립고등학교 수업료보다 쌌다는 대학의 학비와 300원 하던 라면값과 방 한 칸, 부엌 한 칸 이어붙인 자취방들, 석양이 물드는 금강의 백사장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던 상록원, DJ가 틀어주는 음악이 있던 상록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부는 잘했으나 대부분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지방 사범대학의 학생들에게 상록원은 기쁨과 위안을 주는 장소였다.
"상록원의 라면은 아주 꼬들꼬들했어. 그리고 라면 하나도 아주 예쁜 그릇에 담아 주었어. 식탁보가 있는 원형 테이블이 당시는 흔치 않았어. 대접받는 느낌. 아! 나, 대학생인가 봐. 싶은 생각이 드는 거지. 라디오 아니면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시절에 상록원에서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들으면서 강을 보고 있으면 요만했던 마음이 바다처럼 커졌단다."
"상록원 주인아주머니가 참 잘해주셨어. 가서 음식을 안 시키고 그냥 앉아있어도 내쫓지 않으셨고 돈이 없으면 공짜로 주실 때도 있었어."
대학을 졸업하고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사람에 따라서는 수많은 질곡의 시간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넘어온 고개를 돌아보니 오롯하고 예쁘게 존재하는 낭만의 한 시기가 거기 상록원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동아리 학생들은 열심히 받아적었다. 학생들의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계신 공주학연구원에서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상록원의 막내 아드님을 수소문하여 연결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셋째 형수님인 당시 상록원 운영자, 구본희 여사를 뵐 수 있었다. 연세 여든셋. 선생님들의 기억대로 아담하신 몸집에 차분하고 여전히 고우셨다.
"그렇게 다들 기억해주신다니 고맙지요. 학생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어머니 배고파요! 하던 시절이었어요. 라면 그릇도 커피잔도 좀 큰 걸 샀지요."
두어 시간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분은 한 마디도 부정적인 말이나 자신을 자랑하는 말이 없으셨다. 선생님이 되고 나서 찾아와 외상값을 갚은 학생을 고마워했고 상록원이 문을 닫을 때 이사를 도와준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셨다. 그분은 그냥 식당 주인이 아니었다. 사람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따뜻하게 품은 대모였다. 우리 학생들은 옛 시간과 장소에 담긴 깊은 마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까? 한 사람의 너그럽고 온화한 삶이 누군가의 한 시기를 이렇게 빛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학생들보다 내가 먼저 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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