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학 교수 |
교육이 죽었다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특히 대학은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라 존폐 위기까지 내몰린 시대적 상황에서 스승에 대한 관심을 거론하는 것이 사치이자 현실 모르는 맹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육에 대하여, 교육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우나 고우나 교육이 살지 않고는 사회 진보를 이룰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러면 교육을 되살리는 길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당연히 교육에 대한 투자를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 없이 교육 개혁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면 우리는 교육에 대한 투자가 약한 나라일까? 결코, 아니다. 선진국 모임인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공교육 투자 비율이 평균 5% 정도인데 우리도 5%를 상회하고 있다. 여기에 사교육 투자까지 합하면 연 7%를 넘어 상위권에 속해 있다. 그러니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적어서 문제라는 판단은 그리 옳은 판단이 아니리라.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 필자는 현장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와 교수에게 있다고 본다. 흔히 교육입국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핀란드의 교육자 ‘카이스 카르카이넨’도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핀란드 교육의 성공 요인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교사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하지 않던가? 눈길을 돌려보자. 과연 교육 주체인 교육자의 실상은 어떨까? 필자가 속한 대학에서 품은 짧은 생각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실무 법조인으로 일하다가 대학에 와서 느낀 첫 번째 의문점은 교육자로 온 필자가 실상 교육학원론 한 번 접해본 적이 없고,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에 관한 공부를 해본 적도 없으며 연수를 받은 적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수가 되어 학생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 주위를 보니 필자만이 아닌 사범계열 교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대학 강단에 서기 전에 교육학 등을 공부해본 경험이 없었고, 기껏해야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수법특강 수강 정도가 전부이었다. 세상에! 교육의 기본조차 알지 못하면서 교육자로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수는 연구가 생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연구에 그친다면 그것은 각종 연구소의 연구원과 별반 차이가 없다. 교수를 교수답게 하는 것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교육에 있다. 대학은 교육기관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교수에 대한 교육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드는 의문점은 교수 채용절차이었다. 어느 조직이든 우수 인재의 발굴이야말로 조직의 명운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영역일 것이다. 대학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교수채용의 현실은 어떤가? 과연 진정으로 실력 있고, 성실한 사람을 가려서 뽑고 있는지, 아니면 정실에 따라, 또는 기존 교수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편법을 넘나들면서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대학은 교육이념의 구현과 대학발전에의 기여라는 목표를 실현할 적임자를 모실 제도적 장치를 구비하고 있는지, 과연 대학 구성원들은 본래의 취지대로 이를 잘 운용할 수 있는 의식문화를 갖추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아프지만 되돌아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이러한 현실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관이 제대로 정립될 수 있고, 제자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으며, 직업적 사명감과 헌신이 체화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하는 교육으로 제대로 된 교육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제 적어도 대학에서는 정실과 이해관계로 교수를 뽑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교수를 뽑았다면, 이들에게 교육학, 교육철학, 교육심리학 등에 대한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제공한 후에 교육 일선에 투입해야 하지 않을까? 16년간 교수 생활을 해 온 지려천박한 필자의 우문(愚問)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지점이다.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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