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有備無患) 아닌가? 더 넓게는 건강 유지가 먼저일 것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상태가 좋으면 행동도 좋아진다. 준비 잘한다는 것은 정리정돈이기도 하다. 건강한 사람은 주변도 깨끗하다. 핑계지만, 필자는 준비하고 치우는 시간이 아까워 너저분하게 놔둔다.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지친다. 이쯤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전설 같은 일화가 수없이 전하는 화가 장승업(張承業, 1843 ? 1897)이 그린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이다.
얼핏 넓은 나뭇잎이 무성한 고목, 그 나무에 아이가 오르며 재미있게 노는 모습, 그것을 지켜보는 노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화제가 고결한 선비가 오동나무를 닦다 아닌가? 화제는 오원의 제자이며 서화협회 초대회장을 지낸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08.28 ? 1919.09.10. 도화서 화원)이 썼다고 전한다. 조금 자세히 보자.
연륜이 절로 묻어나는 나무가 먼저 보인다. 5각형 잎이 오동나무임을 짐작하게 한다. 받침대에 오른 아이가 나무 허리 붙들고 서서, 긴 천으로 울퉁불퉁한 둥치를 닦고 있다. 사다리가 없었던지, 밟고 오른 것으로 보이는 높이가 각기 다른 기구가 옆에 놓여 있다. 나무 뒤쪽에 몇 가지 지필묵 같은 도구도 보인다. 아래쪽 사내는 괴석에 앉아 손가락질하며 뭔가 지시하고 있다. 오른팔 얹은 돌 위에 몇몇 소품이 놓여 있다. 누구와 함께 앉아 있었던 듯하다. 그림이 뭔가 이야기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낀다.
예운림(雲林 倪瓚, 1301~1374, 중국 원의 화가)의 고사가 담긴 그림이다. 예찬은 몽골족이 세운 원에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은거하며 시서화 도야에 힘썼다. 고미술품 수집에 힘써 수장가로도 유명하다. 간결한 오두막과 몇 그루 나무, 원초적인 땅이 주요 소재였다. 그의 그림은 수묵 효과의 극대화, 많은 여백이 특징이다. 모사 작품이 많아, 진품 감정이 어려울 정도라 한다. 속된 것을 싫어하고 극단적 결벽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은거하던 운림에 절친한 친구가 찾아 왔다. 다정하게 소담 나눈 친구가 돌아갈 때 무심코 뱉은 침이 오동나무에 묻었다. 오동나무를 애지중지하던 예찬이 친구가 가고 난 다음 동자에게 물로 씻으라 했다는 일화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결벽은 청렴하고 고결한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후세인이 본보기 삼아 따르려 했다. 화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예운림 고사가 장승업의 다른 화폭, 여타 화가의 그림에 다수 전한다. 귀감(龜鑑)이 될 일화와 인물 그려 놓은 것이 고사인물도 아닌가? 겸손하게 마음 추스르며, 그림에 자신을 투영해 본다. 곧 선비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장승업, '고사세동도' 19세기 후반, 종이에 연한 색, 151.2x31cm 삼성리움미술관 |
장승업이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이고, 그림도 중국풍으로 일관했다 폄훼하기도 한다. 게다가, 엄청난 애주가로 익히 알려진 바다. 술이 없으면 그림도 없다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어찌 주태백이가 전부이랴. 작은 그림 하나도 아무런 바탕없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전하는 그림만도 600여 점에 이른다. 저마다 정갈하고 깊은 정신세계, 폭넓은 식견과 학식이 담겨 있음을 본다.
위험을 막기 위해 깨끗이 닦고 정비해야 하는 것이 어찌 개인뿐이요, 하나둘이랴. 세상도 늘 돌아보고 정리정돈 하며, 깨끗이 닦고 기름 쳐야 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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