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칼럼] 꽃의 언어와 활자의 언어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칼럼] 꽃의 언어와 활자의 언어

이은봉(시인, 대전문학관 관장)

  • 승인 2021-05-19 12:09
  • 신문게재 2021-05-20 19면
  • 오희룡 기자오희룡 기자
이은봉
이은봉(시인, 대전문학관 관장)
공주의 나태주 시인이 정년퇴직을 하기 직전 장기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할 때이다. 계간 '불교문예'의 일로 잠시 장기초등학교에 들른 적이 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물었다. "선생님!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무엇이 안 좋아집니까." 나태주 시인이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정년퇴직을 하면 큰 병에 걸린대요. 그 큰 병부터 조심해야지." "큰 병이라니요? 병명이 무엇이지요?" 나태주 시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독이라는 병이에요." "아, 고독병요. 그 병에는 제가 하도 많이 걸려 이미 면역이 되었요. 항체가 생긴 지도 오래되었고요." 그가 말했다. "나는 이 고독병이 무서워요. 무슨 일거리가 있어야 이 병에 걸리지 않을 거예요. 이 교수도 정년퇴직을 한 뒤 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이 고독병이 무서웠을까. 나태주 시인은 정년퇴직 후에도 왕성하게 문화예술 활동에 나섰다. 공주의 문인들과 이런저런 조직을 만들어 활동도 했고, 충남시인협회, 공주문화원, 한국시인협회 등에서도 훌륭한 역할을 했다.

세월은 빨라 한참 후배인 나도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75세까지는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지? 어쩌면 80세가 넘게 살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지? 어쩌다 보니 나도 고독병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누구나 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공부하기 마련이다. 나는 운이 좋아 좋은 선생님들, 훌륭한 선배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분들이 있다. 『녹색평론』을 만들다가 지난해에 이승을 떠난 김종철 선생님도 그런 분이다. 대학시절 처음 만나 김종철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공부한 것은 엄청나게 크다.

김종철 선생님은 늘 대지 자연과 직접 만나는 일에 대해, 나아가 농사일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대지 자연과 직접 만날 때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있거니와, 그 과정에 형성되는 마을문화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선생님의 견해에 기대지 않더라도 사람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 대지 자연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나태주 시인이 말하는 고독병을 이기고, 김종철 선생이 말하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정년퇴직을 하기 훨씬 전 나는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에 조그만 밭뙈기 하나를 마련하고, '부채밭'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이런 일에 나선 것은 내 고향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일대가 세종시에 의해 수용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일에 나선 데는 세종시의 건설 과정에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만들고 싶은 뜻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지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분주한 일상 때문에 나는 공주시 정안면에 새로 만들고 싶었던 고향을 아직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 하고 있다. 이에는 도시도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하고, 농촌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내 엉거주춤한 태도도 한 몫 했다.

5월에 들어서자 내 농사터 부채밭 가에도 별별 꽃들이 다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들 별별 꽃들이 피는 줄도 모르는 채 허겁지겁 살고 있다. 분주한 일상 때문에 제대로 대지 자연의 변화를 살피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분주한 일상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 역시 대부분 책이나 활자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선불교에서는 책이나 활자들과 헤어져야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돈오돈수를 주장한 성철 스님도 이사를 할 때는 일곱 트럭씩이나 책을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인 나 같은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대강은 책이나 활자들에 묻혀 사는 것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렇지. 꽃의 언어는 팽개쳐버리고 활자의 언어나 쫓아다니다니!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고교 당일 급식파업에 학생 단축수업 '파장'
  2. 대전 오월드서 에어컨 실외기 설치 작업자 추락해 사망
  3. 열악했던 대전 여성노숙인 쉼터…지원 손길로 '확 달라졌다'
  4. "뿌리부터 첨단산업까지… 지역과 함께 혁신·성장하는 대학"
  5. 대전 중구 교육부 평생학습도시 신규 선정 '중구가 대학, 온마을이 캠퍼스'
  1. 대전교사들 "학교 CCTV 의무화, 사건 예방에 도움 안돼" 의무화 입법에 반발
  2. 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3. 대전 금고동 주민들 "매립장·하수처리 공사장 먼지에 농사 망칠판" 호소
  4.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5.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헤드라인 뉴스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탄핵정국 속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4·2 재보궐선거 본 투표 당일인 2일 시의원을 뽑는 대전 유성구 주민에게선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발현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저마다 투표소로 향한 것이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유성구제2선거구의 온천2동 제6투표소 대전어은중학교는 다소 한산한 풍경이었다. 투표 시작 후 4시간이 흘렀지만 누적 투표수는 고작 200표 남짓에 불과했다. 낮은 투표율을 짐..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약 9500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40대 차주의 평균 대출 잔액은 1억 1073만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53만 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1인당 대출 잔액은 지난 2023년 2분기 말(9332만 원)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했다. 1년 전인 2..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 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 한산한 투표소 한산한 투표소

  •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