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안 기자 |
파블로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1973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니 대전에 사는 나에게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 피카소가 1951년 남긴 '한국에서의 학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의문을 풀어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n en Coree)'에 구불구불 골짜기는 우리네 마을 같고, 흙놀이 하는 어린이며, 젖가슴을 드러낸 검은 머리까지 천생 우리네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무엇인가 겨누는 남자들, 총 같고, 창 같으면서도 세뇌를 당한 머리를 어깨에 뒤집어쓰고 있는 마네킹 같기도 하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1951년에 그렸는데 한국전쟁에서 국군이든 미군이든 주체가 누가 되었든 민간인이 공권력에 의해 학살당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길아트의 '창조자 피카소'에서는 "그의 의도는 그림 그 자체가 말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었다. 고의적이든 아니든 이 그림은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였다"라고 소개되었다. 마로니에북스의 또다른 책에서는 미국의 참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설했다. 군인들에게 내맡겨진 여자들 그림에서 영웅적인 중국 및 한국 공산당 동지들의 모습은 찾아낼 수 없다는 점에서 프랑스 공산당 역시 이번 그의 그림을 거부했다고 한다.
주목하는 것은 한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반인륜 범죄가 지구 반대편의 유럽에 전파되어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고 직접적인 행동이 되었는가이다. 실마리는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의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때 대전에 머물며 전쟁상황을 취재한 전쟁특파원이 미군 측에서만 대략 20여 명 된다. 반대 측에서는 데일리 워커의 한국전쟁 특파원 앨런 워닝턴과 북한 작가들도 대전에 들어와 한국전쟁을 취재했다. 한국전쟁에 참상은 전쟁특파원에 의해 세계에 보도됐고 이를 피카소가 접했을 것이다. 피카소가 앞서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에 희생된 주민들의 고통을 표현한 '게르니카', 집단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언론 보도에 자극받아 완성한 '시체안치소'처럼 말이다. 우리의 슬픈 역사를 반성하고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하며 시대에 남을 상징을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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