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에 없는 대전충남史] 민주화운동 일으키고 떠받친 충청…중앙로는 무대 시민이 주인공

[검색에 없는 대전충남史] 민주화운동 일으키고 떠받친 충청…중앙로는 무대 시민이 주인공

5.민주화운동 역사 속 대전충남
3.8민주의거 시작해 한일협정 반대시위
87년 6월항쟁에 연인원 50만명 동참
민주주의 열망 떠받치고 전국화 일으켜

  • 승인 2021-05-05 12:31
  • 수정 2021-08-09 17:21
  • 신문게재 2021-05-06 10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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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 기간 대전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대전시민과 충남도민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흘린 땀방울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넘어진 소가 앞다리는 거들뿐 결국에는 뒷다리에 하중을 실어 몸을 세우 듯, 대전충남은 민주화운동을 전국화로 일으키고 때로는 주저앉지 않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까지 중앙로 1.1㎞는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마다 시위를 무릅쓴 시민과 학생들이 점유했고 함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듣기 싫다 게다 소리"

1964년 3월 중도일보 지면에 대전에서 벌어진 한일 외교협정 반대 시위 소식이 전면에 걸쳐 타전됐다. 이 당시 박정희 정권은 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과의 국교 정성화와 식민지 지배 청구권을 요구하는 등 한일회담 타결을 시도했다.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만나 협상하면서 '김-오히라 메모'를 포함한 회담 진전 과정을 모두 비밀에 부쳤다. 결과적으로 이때 한일협정은 타결되지 않았으나 1964년 3월부터 두 나라는 '한일실력자 회담'을 재개해 한일협정을 다시 시도하면서 국민적 저항을 초래했다. 3월 24일 서울에서 처음으로 규탄 시위가 전개됐고,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고 바로 다음날 대전에서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대전역과 옛 충남도청에서 터저나왔다.

1964년 3월 중도일보는 보도를 통해 "오전 9시 30분 대전고 학생들이 대전역 광장에 연좌해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라는 취지문을 낭독한 후 충남도청 정문 앞까지 행진했다. 학생 대표 4명이 노명우 충남도지사를 면담했다"라고 전했다. 같은 날 충남대 문리대와 농대, 법대 등 학생 700여 명도 낮 12시께 교정을 나와 여대생을 선두로 도청 앞을 지나 시가지를 행진하며 '대일국교 정상화 반대'를 외쳤고, 7가지 결의문을 채택하고 역시 도지사에게 전달 후 자진 해산했다고 기록됐다.



▲학생 6000여 명 대전역 총집결

일제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아 진정한 사과와 뉘우침을 받기도 전에 일본과 외교를 정상화하려 하자 대전에서는 학생 6000여 명이 대전역 광장에 집결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4년03월29일 한일협정 반대 시위
1964년 중도일보 보도. 한일외교협정 반대 대전 시위 사진에 '데모대를 지키는 대전시민'이라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 계속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방송한 직후 대전에서는 5개 중·고교 연합시위가 벌어졌다. 대통령의 특별방송을 취소하라는 전에 없던 강도 높은 요구가 시위 학생들에게서 제기됐으며, 대전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 경찰로부터 지키는 모습이 사진기사로 타전됐다. 중도일보 3월 29일자 지면은 전날 있었던 대전지역 고교 연합시위를 이렇게 묘사했다. "중도공업고 학생 500명이 대전역 광장에 먼저 도착하고 대전여고 1200명, 대성고 500명, 대전상고 2000명, 대전여상 1500명이 순서대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고 대표단을 소환할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TV방송으로 중계됐고 중앙정보부장이 귀국해 전국적으로 한일협상 반대시위가 잠시 숨고르기에 접어든 때 대전에서 고교 연합시위 형태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는 시위가 전개된 셈이다. 이날 중도일보는 경찰과 대치하는 학생시위대 사이에 시민들이 일렬로 줄을 선 모습의 사진을 지면에 게재했는데 '데모대를 지키는 대전시민들'이라는 사진설명이 붙었다. 6월 3일 충남대 농대 학생들 400여 명이 대전경찰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고, 4일에는 보문고 학생 700여 명이 대전역을 거쳐 도청까지 행진했다. 이밖에 1965년 4월 3일 공설운동장서 강연회 후 시민회관 앞까지 행진, 같은 달 23일 대전감리신학대학교(현 목원대) 학생 150명의 반대시위가 전개됐다.

▲비화된 학생데모, 4.19혁명 낳아

대전과 충남 민주화운동의 뿌리는 1960년 3.8민주의거에서 찾을 수 있다. 중도일보는 1960년 3월 9일자 중도일보는 '비화된 학생데모, 운동장 입구서 수명 경찰에 연행'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날 대전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알렸다.
1987년 6월항쟁
1987년 6월 민주항쟁 기간 학생들이 대전역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대전천 제방으로 향해가던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로 제방 근처에서 대열이 흩어지고 일시 아수라장을 이룬 후 다시 대열을 갖추어 중교다리를 건너 역전을 돌아 도청으로 향해 달려가다가 목척교를 건너기 직전 경찰백차에 전도가 차단됐다." 당시 본보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사태를 이렇게 긴박하게 전했다. 또 10일 대전상고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신안동 굴다리를 거쳐 역전통을 향하면서 출동한 경찰에 제지되면서 역전통과 중앙시장통으로 갈라졌고 수십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는 여당을 찬양하는 정부신문을 학급비로 강제구독하고 수업시간에는 이승만 박사의 미국망명시절 연설을 들어야 했으며 학교 밖에선 고무신과 막걸리, 돈 봉투가 오가는 부정선거가 절정이던 시기였다. 대전지역의 학생의거는 대구 2·28민주화운동 이후 첫 학생시위였으며, 마산 3.15민주의거 등 다른 지역으로 번져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천안공고와 천안농고, 천안여고 학생들이 천안세무소 앞에서, 충북 충주고, 충주여고, 충주농고, 세광고 학생들이 독재정치 중단과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민주화 불씨를 지폈다. 이후 4·19혁명이 서울에서 촉발되고 같은 달 26일 충남도청 앞에서 충남대·대전대, 남녀 중고등학생 1000여 명이 모여 '쓰러진 국민주권 정의로서 인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과정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연인원 50만 명 6월항쟁

대통령직선제와 학원의 자유화 등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치열하게 전개된 1987년 6월 항쟁에 대전과 충남에서는 연인원 50만 명이 참여해 불씨를 지켜냈다.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는 수용하지 않고 기존 헌법으로 체육관선거를 통해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정권에 맞서 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서울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충남에서 민주교육 실천에 앞장서다 파면당한 뒤 암 투병하던 이순덕 교사가 사망하면서 민주투쟁에 각오를 다지게 됐다.

2016년 발행된 '대전충남민주화운동사'에 따르면 6월 10일 대전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예정됐던 국민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됐으나, 성심당제과와 대전극장, 동양백화점 주변에서 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대는 1만 명까지 늘어나 대전역과 충남도청을 잇는 중앙로를 점유하고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요구했다.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은 6월 15일 뜨겁게 폭발했다. 충남대 학생 8000여명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학교 밖으로 진출해 유성파출소와 유성관광호텔을 거쳐 대전역까지 장장 12㎞를 걸으며 독재타도를 요구하는 대행진을 벌였다. 이날 학생들이 서대전사거리와 도청 앞을 거치는 동안 목원대와 침신대 학생들과 시민들이 속속 가세하면서 중앙로에 도달할 때는 1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남대 학생 5000여 명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는 정문 대신 후문 밖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였고, 대전대 학생 500여 명도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시위에 동참했다. 16일에는 더 큰 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대전 유락백화점과 대전역광장, 아카데미극장골목에서 전개됐고 이날 저녁 중앙로에는 2만 여명이 운집했다. 이때 서울에서는 민주화운동 시위대가 마지막 보루 명동성당에서 경찰에 포위돼 자칫 불씨를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대전에서 대규모 시위가 터졌고, 민주화운동을 전국으로 재확산해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검색에 없는~5편]대전충남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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