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영도 마찬가지 아닐까? 국가 경영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소망하는 나라쯤은 새기고 나서지 않았을까? 때때로 정체성, 방향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한다. 플라톤의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기대하진 않는다. 잘 못 되었으면 고쳐나가는 것이 당연지사다. 공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잘못이다.
여러 잣대 중 하나, 다른 나라 사람이 동경하고 살고 싶은 나라가 되면 어떨까? 살던 사람조차 떠나고 싶은 나라, 너무 슬프지 아니한가?
새터민, 이민자, 체류자가 많다. 이러저러한 자료에 근거하여 합치면 수백만이 된다. 그만큼 나라가 바람직하게 성장해 왔다는 증거이리라. 나라도 악으로 점철되어있고, 이주자 역시 악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주자에 국한하여 보자.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한 바 없이 무임승차하여 열매만 딴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필요악, 자연적 흐름으로 보기도 한다. 마을에 부잣집이 있으면 사람이 꼬이기 마련이다. 그저 식충이 아니다. 밥값은 한다. 나아가 획기적인 기여도 한다. 둥지를 옮기려면 상상 이상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꿈, 열정 없이 불가능 한 일이다. 지식 정도가 문제 되지 않는다. 발길 옮길 때부터 이미 빼어난 인재이다.
구글(Google), 인텔(Intel), 이베이(eBay), 페이스북(Facebook), 링크드인(Linkedin), 테슬라(Tesla)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미국 회사 이름이다. 마우로 F. 기옌 저 <2030 축의전환>에 의하면, 이 기업들은 미국 경제에 혁명을 일으켰다. 또 하나 공통점이 있다. 창업자 혹은 공동 창업자가 모두 이민자 출신이다. 뿐만이 아니라, 미국 첨단 기술 관련 신생 기업 23퍼센트는 이민자가 창업한 것이라 한다. 2000년 이후 화학, 물리학, 생리의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 85명 가운데 33명이 이민자라 한다. 미국 국적 수상자의 40%이다.
세상에 누구도 적이 아니다. 스스로 적을 만들 뿐이다. 무능력자는 없다. 적재적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특히나 한 나라 지도자가 흑백구분을 해서야 되겠는가? 조직 구성원의 성향이 일정한 비율로 존재함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필요 없다고 제거해도 변함없이 존재한다. 강조해왔다. 미래 지도자상의 첫 번째 덕목은 전체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피아 구분하고 나누거나 솎아내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고 함께 가는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있다.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는 악명 높은 강도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어다 자신의 쇠침대에 뉘어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자르고, 침대보다 짧으면 다리를 늘려 죽였다. 그 강도는 같은 방법으로 침대에 눕혀지고 머리와 다리가 잘려 죽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훗날 억지 주장이나 융통성 없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는 관용구로 사용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라 한다. 융통성 없는 교조주의적인 생각을 말한다.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개인차를 인정하지 않으며 지나친 획일화를 강요한다.
보궐선거가 끝난 지 십여 일 지났다. 이번 선거에도 여지없이, 거짓말도 진실이 된다는 괴벨스의 무한반복(無限反復) 전략,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프레임전략,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 전략이 반복되었다. 모두 이성을 마비시키는 악마이다. 지금같이 있으나 마나 한 선거법으론 공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대로 지속해 간다면 선거를 어찌 민주주의 꽃이라 할 수 있으랴.
참패한 여권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절절한 반성의 소리였다. 그동안 뭐 했나 싶고, 침묵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더니 수일도 지나지 않아, 자기성찰은 사라지고 다시 팬덤이 난무한다. 다양성을 뭉개는 팬덤 역시 악마라는 생각이다.
험담이나 하자고 칼럼을 쓰는 것이 아니다. 진정 어떤 나라가 살고 싶은 나라일까? 오늘도 자문해본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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