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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친구가 시골 고향에서 베어 온 거라며 미나리 한보따리를 나에게 안겼다. 짙은 갈색의 줄기가 대나무만큼 굵고 싱싱했다. "미나리전 해먹어봐." 친구는 이 말만 불쑥 하고 갔다. 미나리는 여태까지 살짝 데쳐 조물조물 무치거나 날것을 밥과 함께 비벼먹은 것밖에 없는데, 미나리전이라고?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반반 섞고 시퍼런 미나리를 싹둑싹둑 잘라 넣어 팬에 기름을 듬뿍 두르고 부쳤다. 기름의 고소함과 미나리의 향긋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마침 같은 아파트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생각나 미나리 한 다발을 갖다 드렸다. 좋은 건 나눠먹어야 제 맛이다. 몇날며칠을 퇴근하면 미나리전을 부쳐먹었다. 비오는 날 막걸리랑 먹어도 찰떡궁합이겠는 걸? 부침개만 해먹다 삼겹살에 먹어도 좋겠다 싶어 휴일 점심에 거하게 한 상 차려먹었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경이로운 맛이었다. 원더풀 미나리!
올 봄은 이 미나리가 특별한 존재가 됐다.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 누구나 먹을 수 있고 김치에 먹고 찌개에 넣어 먹는' 미나리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영화 '미나리'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또 한번 일을 낼 지 기대된다. '미나리'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리고 강열하다. 가족은 어느 문화에서나 보편성을 띤다. 끈끈하거나 징글징글하거나. 그래서 가족의 정의는 다채롭다.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 했다. 인간은 왜 이 끔찍한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미나리'의 제이콥 부부처럼 모국을 떠난 이민자에게 가족은,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는 고인이 된 시인 허수경은 이역만리 독일에서 오랫동안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했다. 시인은 어느 해 봄 마당 귀퉁이에 고향에서 먹던 채소를 심었다. 미나리와 깻잎, 고추, 갓. 하지만 우박이 내려 망쳤다. 시인은 마당 귀퉁이에 서서 울었다. 많은 인내가 필요한 바빌론의 고대어를 배우는 것보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일까. 삭아들어가는 볕에 앉아 마늘을 까던 어머니의 아린 숨결. 이방인으로 살아간 시인에게 고향의 맛은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인류는 여기에서 저기로 계속 이동을 한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인류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륙도 어떤 한 뼘의 땅도 온전히 주인이 존재할까. 이주의 역사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마당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머슴인가. 재난 앞에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득세하는 지금 이주민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아시아계에 대한 범죄가 급증하는 추세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 겨울엔 한 여성 이주노동자가 한파에 난방기가 고장 난 비닐하우스에서 숨지기도 했다. 동남아 가난한 나라 출신의 이주 노동자나 탈북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 말이다. 부유하는 이주자들의 신산한 인생역정. 진창에서도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미나리 같은 사람들. <제2사회부장 겸 교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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