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충청도 어감으로 판소리를 구사한 박동진 명창'...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중고제 명창 김창진 문하에서 심청가 등을 사사한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동진 명창의 1970년대 공연 모습(고수 김득수).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
이 사설의 가장 큰 특징은 '허네 그려, 왔소, 헐 말' 등처럼 전형적인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 점이다. 현재 판소리 사설은 이 대목뿐만 아니라 현재 구전돼 온 심청가, 수궁가 등 판소리 5바탕 사설 전체가 거의 전라도 사투리로 돼 있다.
판소리 초기 명창들은 대부분 '충청도 소리꾼'이었다는 주장이 학계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본보 3월 24일 보도= [10년간의 취재 기록-3]…'판소리 심청가 음악문화'…충청도 명창이 주도(主導)했다> 그렇다면, 현재 판소리 사설이 전라도 사투리로 전승돼 온 까닭은 무엇일까. 또 판소리 사설의 흐름은 어떻게 전개돼 왔을까.
노재명 국악학자에 따르면 판소리 가사 어투는 크게 3단계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초기의 경기, 충청권 명창은 그 지역의 어감을 가미해 소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 판소리를 불렀던 것으로 알려진 충청도 명창, 하은담과 최선달 명창이 그 예다. <본보 4월 13일자= [10년간의 취재 기록-9]'신재효 일까, 송흥록 일까'…우리나라 첫 판소리 명창은 누구일까?>
하은담과 최선달 명창 이후, 전라도 명창들이 대거 출현한다. 이들의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전라도 사투리가 포함된 소리가 성행한다. 또 판소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왕의 관심과 벼슬을 받게 된 '어전광대'가 등장했고, 이들은 소리판의 새로운 장르를 형성해 갔다.
어전광대는 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왕실에서 소리한 명창을 말한다. 어전광대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중가요의 '톱스타' 급이다. 어전광대는 궁궐 품격에 맞는 서울 표준 어투로 소리를 했다.
어전광대의 등장은 충청식의 판소리 사설을 한양, 즉 지금의 서울 스타일로 변모시킨다. 아무래도 어전에서 소리를 하다보면 지역적 특색인 방언을 배제했을 것이다. 따라서 판소리 사설도 표준어로 구사해야 했고, 명창들의 의복이나 행동거지(行動擧止) 등도 왕이나 엄격한 궁중 예절을 따라야했을 것이다.
어전광대 시절, 궁궐의 부름을 받지 못한 그 밖의 수많은 각 지역의 명창들은 각자의 고향인 충청도, 전라도 등의 사투리가 반영된 소리를 제각각 구사했다.
충청남도 서산 국악 명가문의 판소리·가야금병창·전통춤 명인 심화영 선생. 1995년 심화영 선생 자택에서 노재명 판소리학자가 촬영했다. 심화영 선생은 전통적인 충청도 어감의 판소리를 구사한 마지막 세대 명창이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
그리고 왕조시대(王朝時代)가 끝이 난 뒤, 어전광대는 사라진다. 이후 충청도 중고제가 점차 소멸되고 전라도 동서편제가 압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라도 명창들이 지속적으로 대거 출현했고, 전국 판소리 무대를 거의 독차지했다.
이처럼 전라도 동·서편제 소리가 대세가 된 후 '전라도 방언'이 포함된 판소리 사설, 호남 억양 발음이 판소리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 강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반면 20세기 한때는 경상도 지역에서 명창들이 상당수 나오면서 경상도 사투리를 기반으로 판소리 아니리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편, 현대 판소리계의 대명사로 불리는 충남 공주 출신의 박동진 명창을 비롯해서 충남 서산 출신 심화영 명창, 충남 홍성 출신 김차돈 명창이 전통적인 충청도 어감의 판소리를 구사한 마지막 세대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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