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등하불명, 어몽룡의 '묵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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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등하불명, 어몽룡의 '묵매도'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21-04-09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아주 밝은 것도 아니고 / 아주 어둡지도 않아서 / 아침 아지랑이에 햇빛 비치듯 / 항상 마주 앉아도 답답치는 않고 / 옛 산들이 어른거린다 / 잡음(소리)을 막아서 / 정(情)에 한(限)이 없고 치우치지도 않네 / 동방의 예지(叡智) / 하루의 햇빛을 골고루 맞아들이며 / 성자(聖者)의 눈을 감네 / 정월달에 한국의 창호지에는 / 매화가 핀다"

김광섭(金珖燮, 1906.9.21. ~ 1977.5.23. 시인) 시 '창호지(窓戶紙)'이다. 창호지 붙인 창살 문 들락거리며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다. 한옥은 미닫이와 여닫이 이중창으로 되어 있어 보기보다 단열이 잘된다. 인체에 유해 한 자외선은 차단시키고, 필요한 적외선은 통과시킨다. 은은한 자연채광으로 무슨 일이고 하기에 불편이 없다. 눈도 피로하지 않다. 늦은 밤 등잔불이 창살에 빚어내는, 화롯가에 둘러앉거나 턱 괴고 엎드려 듣는 할머니 이야기, 새끼 꼬는 아버지, 아이 어르거나 바느질하는 어머니, 밤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동화의 나라. 그림자놀이는 은밀한 처리가 필요한 영화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밖에서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정월에는 창호지에 매화가 핀다. 추위에 떨던 겨울 달빛이 추녀 아래로 숨어들기라도 할라치면, 뜨락 나뭇가지가 밤새 창문에 서성인다. 그렸다 지웠다 하는 묵화가 잠을 쫓고 무념무상으로 인도한다.

은근함에 매혹되어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다. 그림 그린 화선지 위에 새 화선지 붙여보기도 하고, 그림 그린 화선지를 돌려 붙이기도 했다. 기름을 먹이기도 해보았다. 어느 것이고 창살의 창호지 동화가 살아나지 않았다.



그림은 어몽룡(雪川 魚夢龍, 1566 ~ ?, 화가, 진천현감)의 시의도 '묵매도(墨梅圖)'이다. 어몽룡은 묵매를 잘 그려, 묵죽을 잘 친 이정, 묵포도로 이름 떨친 황집중과 더불어 당시 삼절(三絶)로 불렸다. 그에 대해서는 여타 화가와 다르지 않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음양 상반된 성질이 만물을 생멸시킨다. 전쟁도 부분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한다. 어몽룡이 살았던 시기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8년 전쟁이 포함된다. 일본군 14만 명이 침략했다.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도 10만 명 이상이 주둔했다. 이를 매개로 짧은 기간 명나라 문화가 대거 유입된다. 본격적으로 시의도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어몽룡의 매화에는 특징이 있다. 무기교의 기교랄까? 가지가 굴절이 심한 일반적인 형상과 달리 곧게 뻗어있다. 일필과 묵의 농담으로만 그려 담백하다. 그가 그린 국립박물관 소장 '월매도(月梅圖)'의 경우, 가지가 아래에서 위까지 곧게 솟아 있다. 한 호흡에 그어 올린 듯한 가지의 담백한 기상이 대단하다. 중국인은 중국 그림과 다르다거나 거꾸로 드리운 모습이 없어 유감이다, 매화가 아니다 평하기도 했다. 당시 어몽룡은 조선에서 매화를 가장 잘 그리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따라서 중국인의 혹평에도 불구, 그의 화풍은 조속(趙涑)과 오달제(吳達濟), 허목(許穆), 조지운(趙之耘) 등의 묵매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양동길
묵매도, 어몽룡, 견본수묵, 20.3㎝ × 13.5㎝, 간송미술관
다시 '묵매도'를 보자. 아주 작은 그림이다. 부드러운 농담의 변화가 돋보인다. 활짝 핀 매화꽃 몇 송이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 '월매도'에서 보이는 기품은 없지만 담백한 멋은 그대로다.

시의도 형식이 잘 갖추어진 첫 번째 그림으로 평가된다. 그림 왼편에 시가 있다. 중국 원나라 매화니라고 하는 사람이 쓴 것이다. 윤철규 저 '시를 담은 그림, 그림이 된 시'에서 옮겼다.

"종일 봄을 찾았건만 보지 못하고 / 짚신 고갯마루 구름만 밟았네 / 돌아와 짐짓 매화 내음 맡아보니 / 봄은 가지 끝에 벌써 와있었네. / 원대 매화니, 설천이 쓰다 (終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嶺頭雲 歸來?撚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元梅花尼, 雪川書)"

살을 에는 혹한에도 잠시 잠깐 스치는 조각 바람에 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생물이다. 훈풍이 조금만 실려있어도 길을 나선다. 종일 찾아다니다 돌아와 보니 뜰에 핀 매화나무 가지에 봄이 와있더란 말이다. 매화는 고귀함, 고결한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역시, 가까이 평범한 가운데 있다는 의미 아니랴. 시적 감흥, 미적 쾌감이 예에 있다.

상춘객뿐이랴? 곁에 두고 일생토록 헛되이 찾아 떠도는 것이 인생은 아닐까? 등하불명(燈下不明), 가끔 상기해 보자.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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