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다. 고려 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최영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왕의 지시로 이성계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엄청난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출발한다. 그러나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고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오로지 요동 정벌의 뜻만 밝히며 이성계의 요청을 묵살됐다. 이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군사를 돌려 개경의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위화도 회군의 성공은 고려의 멸망을 앞당긴 반면 이성계는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받아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됐다.
두 번째는 1979년에 일어난 10·26 사태다. 삽교호방조제 준공식 행사를 마친 박정희 대통령은 그 날 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비서실장 등과 술자리를 갖게 된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 부장은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비서실장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 김재규 부장은 현장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우고 당시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로 가는 게 낫지 않겠냐며 김재규 부장을 설득, 결국 차량은 U턴 후 육군본부로 가게 된다. 육군본부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게 되고 결국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만약 차량이 U턴을 하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혹자들은 이야기하기도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10·26 이후에 일어난 12·12 사태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기 위해 1공수여단을 비롯한 군대를 서울로 집결시키게 된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같은 시각 9공수여단도 서울로 향하게 된다. 진압군인 9공수여단이 서울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전두환은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1공수여단과 9공수여단의 충돌은 전쟁을 야기 시킬 수 있다며 서로 철수시키기로 합의를 하게 된다. 약속대로 9공수여단은 철수를 하게 되지만 1공수여단은 그대로 서울로 진입,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접수하게 된다. 9공수여단의 U턴으로 전두환과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며 제5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위 세 가지 U턴이 목적지를 잘 찾아간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이미 시간이 흘러 모든 게 역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성희 디지털룸 1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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