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래 유성구청장 |
수명 연장과 노년층의 증가로 제2의 인생을 모색하려는 어르신이 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리나라 은퇴세대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애틋하다. 가정 형편이나 부모의 강요로 자신의 재능을 억누르고 월급 몇 푼에 주저앉은 분들이 대다수다. 자의반 타의반 뛰어든 첫 직장에 평생을 내던졌건만 남은 건 쓸쓸함뿐이다.
미술의 유파 중에 소박파(素朴派·Naive Art)란 게 있다. 19~20세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해 독학으로 늦은 나이에 데뷔한 화가집단의 화풍이다. 이들은 원근법·소실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느낌대로 그림을 그렸다. 언뜻 보면 동화 삽화나 어설픈 비대칭 추상화 같기도 해서 주류화단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소박파의 그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어설프지만 어딘가 정감과 재치가 넘치고 천진난만한 느낌마저 든다. 우리나라의 혁필·책거리그림 등 민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소박파를 두드리면 빌헬름 우데, 앙리 루소, 루이 비뱅, 세라핀 루이 등이 검색된다. 이들 직업은 세관원, 우편배달부, 가정부 등 미술과 관련이 없다. 가난 또는 집안의 반대로 화가의 꿈을 접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뒤늦게 전업작가로 뛰어들어 명성을 얻었다. 일부 작품은 세계 최고의 미술관인 뉴욕현대미술관과 영국의 테이트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기획전을 열 정도다.
이 가운데 파리 우편배달부 출신 루이 비방(1861-1936)의 일대기가 흥미롭다. 미술에 소질이 많았던 비뱅은 증등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았으나 집안사정으로 포기하고 우체국에 취업했다. 이후 61세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42년간 우체국에서 일했다.
전업화가 활동 기간은 은퇴 후 1923년부터 1934년까지 11년에 불과했지만, 오래전부터 화가의 요람인 몽마르트르에 살면서 그림에 대한 영감을 키웠다. 그의 진가는 사후에 나타나 뉴욕 현대미술관 기획전에 수차례 초대되는 등 소박파의 대표화가로 자리매김했다. 비뱅에게 은퇴 후의 삶은 제2의 인생이 아닌 최고 황금기였던 것이다.
비뱅이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우체부로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은퇴 후 화가로의 변신을 착실히 준비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론 당시 유명 화가들의 교류와 창작공간이 돼준 몽마르트르라는 인프라일 것이다. 더불어 소박파를 발굴해 후원을 아끼지 않은 빌헬름 우데와 같은 화상, 즉 재정적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우리나라도 비뱅과 같은 숨은 보석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열의 이외에 정부 차원의 인프라 구축, 행·재정적 지원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대전 유성구는 언제든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일깨워줄 평생학습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다.
2001년부터 구암동과 문지동에 각각 평생학습센터를 개설해 어린이·청소년은 물론 주부, 장·노년층을 위한 비대면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강좌 수만 50~77개에 달한다. ‘5060청춘대학’, ‘배움사랑방’, ‘학습동아리’도 자아실현을 위한 교실이다. 평생학습센터뿐만 아니라 유성지역 곳곳의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도 인문학강좌 등을 수시로 개설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스마트경로당 공모사업에 유성구가 선정돼 시니어평생학습 추진에 날개를 달았다. 어르신들이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ICT를 구축한 스마트경로당에서 각종 교육은 물론 오락, 상담, 회의 등을 소화할 수 있게 돼 기대감이 크다.
유성구는 시대 감각에 맞는 평생학습프로그램과 스마트경로당 사업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일생의 꿈에 도전하도록 뒷받침할 것을 약속드린다.
/정용래 대전 유성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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