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전천변 판잣집 철거 모습. (사진=대전시 제공) |
1959년 6월 대전에서 판잣집 철거가 단행되고 있다. '전쟁의 소산 판잣집 헐어지다'라고 되어 있다. |
대전에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장이 서고 일자리가 생기면서 6.25전쟁 이전에 일상을 회복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됐을까. 휴전을 맺고 몇 년이 흐른 1956년 9월 중도일보 지면에는 태풍 피해복구 대책회의를 주재하는 이기세 충남도지사 소식과 공금을 횡령해 모기장을 구입한 혐의를 받은 대전시장이 구금돼 행정이 진공상태에 빠졌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또 제26회 충남체육대회가 예년보다 많은 참가팀이 모여 진행됐고, 중학교 입학 시 시험 여부를 학교장이 선택하도록 했다는 보도가 있을 것을 보면, 행정과 사법, 교육, 문화체육의 체계가 이미 잡혀있음을 미루어볼 수 있다.
이때 대전시민들의 주거공간은 어땠을까. 중도일보는 1959년 11월 용두동 주택 화재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는데, 이날 용두동 판잣집 2동이 전소돼 약 30만 환의 피해를 냈다고 전했다. 소실된 두 동의 판잣집에는 '14세대 100여 명'이 거주했는데 시는 이들 이재민들에 대한 구호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타전했다. 이보다 앞서 1959년 9월 지금의 중앙로네거리에 있던 시공관(市公館)과 주변 17세대의 판자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마침 수도가 끊겨 진화작업이 지연됐다고 전했다. 6.25전쟁 기간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수 차례 공중폭격이 이뤄졌고 이때 대전역을 비롯해 시내의 대부분 건물은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폐허를 딛고 대전에 정착한 시민들은 판잣집이나 판자건물이 주거와 업무공간이었던 셈이다.
1959년 기사에 판잣집 철거 전후의 사진을 비교해놓았다. |
판잣집은 정착민들을 품어 전후 대전을 다시 세우는 원동력이 되어줌과 동시에 결국에는 철거대상이 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중도일보는 1959년 6월 기사를 통해 "20만 시민이 귀가 젖도록 떠들석했던 판잣집 강제철거가 단행되었다"고 기사와 현장사진을 게재했다. 기사에 따르면 대전 시내에 1300여 호의 판잣집이 있는데 1차로 역전-인동통에서 512호를 철거하고 2차에서는 역전-원동통 그리고 3차에서는 중동, 정동, 은행동 일대와 원동국민학교 후편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비록 움막이나마 내집이련이 빈한한 생활이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안식처가 시세에 의하여 헐리게 됐다"라고 전하고 "동란 이래 판잣집 움막에서 생계를 지탱한 주민들은 세방살이로 생활양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라고 기사를 남겼다. 철거작업은 행정집행이라는 명목으로 시청 공무원과 경찰이 합세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판잣집 강제철거를 묘사한 대목도 있는데 "2대의 트럭에 강제철거 작업대원을 싣고 역전광장에 도달하기 전부터 해당 주민들은 이삿짐을 싸기에 분주했으며, 철거작업반은 역전광장 옆 판잣집부터 헐기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판잣집 철거 관련 기사는 1971년까지 찾아볼 수 있는데 그해 7월 기사에서 대전시는 경찰과 합동으로 오전 6시를 기해 60년 동안 존속한 인동 천변시장 가건물 83동을 강제철거했다고 전했다. 이날 철거작업을 위해 새벽 4시 30분부터 시 직원 350명, 경찰관 150명, 재건대원 100여 명 등 모두 600여 명을 동원했다. 이날 철거에서는 사후대책도 함께 제시됐는데 삼성동청과시장부지 내에 노점을 벌일 수 있도록 입주증을 발부했다는 것이다. 강제철거를 피하려는 몸부림도 있었다. 1960년 10월 신문 지면에 판잣집 지붕을 덮은 군용천막에 페인트를 칠하는 사진이 게재됐는데 군과 경찰의 군수품 단속을 피해 군용천막을 가리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재민 VS 도시재건
철거사업이 수년째 반복되면서 대전에서 이재민이라는 화두가 등장한 것은 1963년의 일이었다. 중도일보는 1963년 10월 보도를 통해 "강제철거시키면 그날부터 많은 이재민을 만드는 결과를 유치하고 말게 된다"며 "곧 다가올 겨울을 앞두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강제철거는 쓸데없는 오해와 많은 부작용을 낳을뿐더러 백성을 사랑한다는 위정당국자의 취할 태도이냐 생각해볼 일"이라고 전했다. 심지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충남에서 여당표보다 야당표가 많이 나왔대서 정치적 보복을 운위하게끔 된다면 하나의 넌센스이라고도 타전했다. 그러함에도 판잣집 철거를 마냥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도시재건 효과 때문이었다. 1959년 8월 또다시 판잣집 철거를 예고하는 기사에서 "자력복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현상유지만을 할 뿐 복구건설에는 등한하는 판잣집 거주민이 있다고 당국에서는 보고 있다"라고 전했다. 또 판잣집 철거가 근대식 고층건물로 복구하는데 기본 요건이 되었다는 것을 실제 사례에서도 확인된다고 전했다. 당시 기사에서 "지난 7월 단행한 제1차 500호의 판잣집을 강제철거한 요즘 당시 철거지구 실정을 보면 약 80%가 가옥건축을 착수하고 그중 약 50%가 준공단계에 있는 건설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전했다.
▲대전 1호 아파트 역설
대전에 세워진 첫 아파트에 입주민이 판잣집 철거 이재민이었다. 1976년 대전시정백서에 따르면 1971년 중구 석교동에 4층 48세대 아파트를 지었는데 대전시에 등록된 첫 아파트다. 당시 문창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주변에 있던 판잣집을 여럿 철거했고 이때 집을 잃은 이재민이 이곳 아파트에 입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대전 1호 택지개발사업인 1985년 동구 용운지구 개발사업 역시 늘어나는 인구를 떠받칠 주택이 필요했고, 시내 판잣집 철거에서 밀려나 용운동에 마련된 판자촌을 또다시 철거하는 데서 출발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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