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이치를 논하는 이들에게 땅은 밑바닥일 뿐 관심사가 아닙니다. 거기 발 딛고 사는 낮은 자들 역시 그러합니다. 필요한 건 윗전, 또 윗전, 가장 윗전에게 바칠 세금일 뿐 내라는 대로 내고 나면 먹고 살 것 없는 이들의 처지 또한 알 바 아닙니다. 귀양살이의 이유는 또 다른 하늘 천주를 섬겼다는 것이지만 유배지에서 맞닥뜨린 것은 땅바닥 사람들의 기막힌 형편이었습니다.
공허한 관념 대신 명징한 사물을 궁구하기로 한 주인공은 물고기, 조개, 해초 등을 조사합니다. 그런 걸 잘 아는 섬사람들을 만납니다. 글과 책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부대끼며 삶이 앎이요, 앎이 삶 자체인 이들과 이야기합니다. 그의 꿈은 임금도 신하도, 양반도 상놈도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뜬구름만 같습니다. 하여 그를 돕던 젊은이 창대는 임금을 도와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뭍으로 갑니다.
이 영화는 많은 사극 영화들이 옛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을 비유하거나 비판하는 것과 다소 결이 다릅니다. 국제 정세와 국방 문제의 첨예함을 다룬 '신기전'(2008),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사이의 갈등 문제를 그린 '남한산성'(2017) 등과 달리 200년 전 조선 후기 인물의 삶과 지식, 그리고 꿈에 대해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첨단의 기술이 극에 달한 시대에 이 영화는 흑백으로 전개됩니다. 인물 사진을 찍는 방식을 따릅니다. 풍경보다는 인물이 돋보이고, 인물 역시 겉모습보다 정신과 내면세계가 드러나도록 합니다. 시인 윤동주를 그린 감독의 전작 '동주'(2016)처럼 이 영화 역시 역사 속 실존 인물 정약전의 정신과 내면세계를 보여줍니다. 옛 사진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도 지금 이곳의 우리와 거리를 느끼게 합니다. 그 거리만큼 성찰과 사색의 공간이 생겨납니다.
다시 바다. 첫 장면의 바다가 정약전의 시점이라면 영화는 마지막 장면 관객들의 시점으로 점점 멀어지는 섬과 넓어지는 바다를 보여줍니다. 끝내 섬과 바다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을 오래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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