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취재 기록-5] ‘국창(國唱)’도 꾸짖던 ‘가신(歌神)’…“그는 인간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0년간의 취재 기록-5] ‘국창(國唱)’도 꾸짖던 ‘가신(歌神)’…“그는 인간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가신(歌神)’ 박기홍 명창, 충청도 명창 ‘정춘풍’의 수제자
박기홍, ‘초기 판소리=충청도 제(制)’ 고집…정통파 판소리 명창
노재명 국악학자, “역대 최고의 명창인 정춘풍 품에서 충청도 소리, 소중하게 여겨”

  • 승인 2021-03-30 11:04
  • 수정 2021-08-24 00:42
  • 신문게재 2021-03-31 17면
  • 손도언 기자손도언 기자
ㅇ
노재명 판소리 학자가 2016년 가신 박기홍(충청도 양반 출신 명창 정춘풍의 수제자)의 단가 '대관강산' 장면을 형상화 한 설치미술 작품. 박기홍 명창은 인물사진이나 판소리 관련 녹음 등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국악음반박물관>
조선시대 8명창 중에 한사람인 송흥록 판소리 명창. 그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서 태어났다. 송흥록 명창은 판소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글로 표현이 안 될 만큼 판소리 계의 큰 스승과 같다.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판소리 장단인 '진양조'를 완성시켰다. 현재의 판소리 명창은 '송흥록의 진양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진양조는 현재의 판소리 5바탕 중에서 '슬픔'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한다. 진양조는 판소리 장단에서 가장 느린 장단이다. 예를 들면 심청가 중 곽씨부인의 유언 대목이나 춘향가 중 이몽룡과 춘향이의 '이별 대목'이 진양조로 구성돼 있다. 송흥록은 특히 '귀곡성(귀신 울음소리)'의 소리를 잘 냈다고 한다. 귀곡성은 춘향가 중 옥중가에서 나오는 대목인데, 송흥록이 이 귀곡성을 부르면 촛불이 꺼지고 천장에서 귀신울음소리도 들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래서 국악계는 그를 가왕(歌王)으로 불렀다. 판소리 계의 왕이라는 얘기다. 조동언 판소리 명창은 "송흥록 명창은 국악계에서 전설처럼 얘기가 오갈 정도"라며 "이름 석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말했다.

송흥록 명창이 가왕이었다면 박기홍 명창은 '가신(歌神)' 또는 '가선(歌仙)'으로 불렸다. 가신이나 가선은 왕을 뛰어넘는 신적인 존재라는 의미다. 사실 두 명창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칭호(稱號)'로만 본다면 박기홍 명창이 더 높은 위치로 비춰지고 있다. 그만큼 뛰어난 소리꾼이라는 얘기다.



국악음반박물관제공_박록주 단가 대관강산1929년 녹음
국창 박록주가 박기홍 명창에게 배운 단가 '대관강산'을 1929년에 녹음한 SP음반. 박기홍제의 교과서적인 소리다. <국악음반박물관>

그렇다면 박기홍 명창은 어떤 인물일까. 먼저 박기홍 명창은 충청도 출신인 정춘풍 명창(3월 28일 보도·10년간의 취재 기록-전라도에 '신재효'가 있다면, 충청도엔 '정춘풍'이 있다)의 수제자다. 가신 박기홍 명창을 제자로 둔 정춘풍 명창은 그야말로 역대 최고의 명창인 셈이다. 박기홍은 전라도 명창이지만 스승인 충청도 정춘풍 명창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정춘풍 명창처럼 중고제와 동편제를 아우르며 신선처럼 살았다.

박기홍 명창은 앞서 얘기한 송흥록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은 아니다. 흔히 말해 박기홍 명창은 송흥록 명창보다 한참 후배다. 가왕이 있었다면 가신도 있었다는 얘기다. 아쉽게도 두 명창은 정춘풍 명창처럼 녹음이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국악계 따르면 박기홍 명창은 구한말 인물이다. 그를 포함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 유성준, 심정순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중에서 가장 뛰어난 소리꾼을 '근대 5명창'이라고 불렀는데, 박기홍 명창은 5명창 중에서도 '으뜸 소리꾼'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동료 명창들보다 한수 위였다는 것이다.

그는 '정통 판소리'를 추구했다. 정통 판소리는 곧 '초기 판소리'다. 스승 정춘풍 명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비록, 최하위 계층인 소리꾼이지만 '명창 자존심'을 지켰던 인물이다. 그는 어전광대(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왕실에서 소리한 명창)를 꿈꾸며 왕과 최고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소리했다. 그러나 왕권이 바뀌고 소위 상류층 팬들이 쇠락하자, '입'을 닫고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정통을 고집한 박기홍 명창은 '판소리의 대중화'를 반기지 않았다. 정통 판소리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정통 판소리보다 '음담패설 판소리' 등을 선호했다. 이를테면 '변강쇠 판소리' 등일 것이다. 그에겐 음담패설 판소리는 자존심이 상할 만한 바탕이다.

특히 박기홍 명창이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꼽혔던 송만갑 명창을 혼낸 일화는 유명하다. 송만갑 명창이 정통 소리를 변질시켰다는 게 이유다.

'중고제 판소리 흔적을 찾아서'(2012년)와 '동편제 심청가 흔적을 찾아서'(2021년)의 저자 노재명 판소리 학자는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같은 판소리 대가들이 박기홍 명창을 일러 '가신이니 일언반사도 평을 가할 수 없다' 했고 박기홍의 제자로는 조학진, 김봉문, 박록주, 김세준, 김정길을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 학자는 "박록주가 박기홍에게 배운 단가 '대관강산'을 녹음한 음반(1929년)에서 박기홍의 엄청난 그늘이 느껴지는데 탈속의 경지에 이른 이 짧은 소리의 짜임새만 들어보아도 박기홍이 가히 송만갑을 어린 아이 대하듯 꾸짖을 만하다"며, "박기홍은 우리나라 최고의 '국창(國唱)'들로부터 인간 세상 사람이 아닌 '가신(歌神)'의 예우를 받은 만큼 국가급 명창을 초월한 우주급 대명창"이라고 평가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교단만필] 잊지 못할 작은 천사들의 하모니
  2. 충남 김, 글로벌 경쟁력 높인다
  3. 건양어린이집 원아들, 환우를 위한 힐링음악회
  4. [아이 키우기 좋은 충남] “경력을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수기업이 보여준 변화
  5. 대전웰니스병원, 환자가 직접 기획·참여한 '송년음악회' 연다
  1. 세종시체육회 '1처 2부 5팀' 조직개편...2026년 혁신 예고
  2. 코레일, 북극항로 개척... 물류망 구축 나서
  3. 대전 신탄진농협, 사랑의 김장김치 나눔행사 진행
  4. 세종시의원 2명 확대...본격 논의 단계 오르나
  5. [라이즈 현안 점검] 거점 라이즈센터 설립부터 불협화음 우려…"초광역화 촘촘한 구상 절실"

헤드라인 뉴스


`대통령 세종 집무실`, 이 대통령 임기 내 쓸 수 있나

'대통령 세종 집무실', 이 대통령 임기 내 쓸 수 있나

대통령 세종 집무실 완공 시기가 2030년에도 빠듯한 일정에 놓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재임 기간인 같은 해 6월까지도 쉽지 않아 사실상 '청와대→세종 집무실' 시대 전환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임기 내 대통령 세종 집무실의 조속한 완공부터 '행정수도 완성' 공약을 했고, 이를 국정의 핵심 과제로도 채택한 바 있다. 이 같은 건립 현주소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어진동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가진 2026년 행복청의 업무계획 보고회 과정에서 확인됐다. 강주엽 행복청장이 이날 내놓은 업무보고안..

세종시의원 2명 확대...본격 논의 단계 오르나
세종시의원 2명 확대...본격 논의 단계 오르나

'지역구 18명+비례 2명'인 세종특별자치시 의원정수는 적정한가. 2026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19+3' 안으로 확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인구수 증가와 행정수도 위상을 갖춰가고 있으나 의원정수는 2022년 지방선거 기준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16+2'로 적용했다. 이는 세종시특별법 제19조에 적용돼 있고, 정수 확대는 법안 개정을 통해 가능하다. 12일 세종시의회를 통해 받은 자료를 보면, 명분은 의원 1인당 인구수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인구수는 2018년 29만 4309명, 2022년..

`금강을 맑고푸르게` 제22회 금강환경대상 수상 4개 기관 `한뜻`
'금강을 맑고푸르게' 제22회 금강환경대상 수상 4개 기관 '한뜻'

금강을 맑고 푸르게 지키는 일에 앞장선 시민과 단체, 기관을 찾아 시상하는 제22회 금강환경대상에서 환경과 시민안전을 새롭게 접목한 지자체부터 저온 플라즈마를 활용한 대청호 녹조 제거 신기술을 선보인 공공기관이 수상 기관에 이름을 올렸다. 기후에너지환경부 금강유역환경청과 중도일보가 공동주최한 '제22회 금강환경대상' 시상식이 11일 오후 2시 중도일보 4층 대회의실에서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유영돈 중도일보 사장과 신동인 금강유역환경청 유역관리국장, 정용래 유성구청장, 이명렬 천안시 농업환경국장 등 수상 기관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 ‘자전거 안장 젖지 않게’ ‘자전거 안장 젖지 않게’

  • ‘병오년(丙午年) 달력이랍니다’ ‘병오년(丙午年) 달력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