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취재 기록-4] 전라도에 ‘신재효’가 있다면... 충청도엔 ‘정춘풍’ 있다

[10년간의 취재 기록-4] 전라도에 ‘신재효’가 있다면... 충청도엔 ‘정춘풍’ 있다

충청도 양반 소리꾼 정춘풍, ‘제(制)’ 넘나든 명창…‘판소리 역사’ 석권
정춘풍 수제자 박기홍, 가왕(歌王)을 넘어 가신(歌神)으로 불렸다
이름 ‘춘풍’처럼 봄바람처럼 생을 마친, 최고의 판소리 명창

  • 승인 2021-03-28 13:13
  • 수정 2021-08-24 00:51
  • 손도언 기자손도언 기자
국악음반박물관제공_정노식저서_조선창극사1940_정춘풍관련기록
정노식 저서 '조선창극사'(1940년) 충청도 소리꾼 정춘풍 명창 관련 기록 <국악음반박물관>
우리나라 판소리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신재효(1812~1884). 그는 전라북도 고창군의 아전 출신이다. 신재효는 고창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신재효의 탄생지인 고창군은 우리나라 판소리 성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를 설명하자면 글로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국악이론에 대가다. 그의 판소리 명성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국악계는 그를 우리나라 판소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신재효의 가장 큰 업적은 판소리 사설을 새롭게 개편한 점이다.

초기 판소리는 12바탕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신재효는 12바탕 중에서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 6섯 바탕을 세련되게 정리했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이때부터 부흥기를 맞게 된다. 신재효의 개편된 사설 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판소리 역사에서 독보적인 인물인 셈이다. 정재훈 전북 고창군 고창판소리박물관 학예사는 "고창군의 모든 사업이 신재효와 연관될 정도"라고 강조했다. 영화 '도리화가'의 실존 인물인 최초의 여성 판소리 명창 '진채선'도 이 지역 출신이다. 그런데 신재효와 쌍벽을 이룬 충청도 판소리꾼도 있었다. 바로 충남 공주 출생인 '정춘풍' 명창이다. 신재효가 교과서 등에 등장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면 그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정춘풍 명창은 이름처럼 봄바람처럼 살다갔다. 그래서 국악계에서조차 익숙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조선시대 헌종, 철종, 고종 때 활동한 동편제 소리꾼이다. '전라지역에 신재효가 있었다면 충청지역에 정춘풍 명창이 있다'라는 말까지 있다. 또 신재효가 이론에 독보적이었다면 정춘풍 명창은 이론과 실기를 해탈(解脫)한 인물로 알려졌다. 정노식의 저서 '조선 창극사'(1940년)에 정춘풍은 동편제 명창이라고 기록돼 있다. 노재명 판소리학자는 "정춘풍이 대개 동편제 명창으로 분류되지만 기본은 충청도 중고제에 바탕을 둔 명창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ㅇ
충청도 중고제 명창 김창룡이 1931년에 녹음한 정춘풍제 심청가 '화초타령' SP음반 가사지. <국악음반박물관>

현재 국악계에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동편제는 조선 8명창이자,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전라지역 '송흥록 동편제'다. 그러나 정춘풍은 송흥록 동편제와 달리 새로운 동편제를 개척했다. 우리나라 판소리 동편제 계파를 살펴보면 크게 '송흥록·김세종·정춘풍 동편제'로 구분된다.



정춘풍 명창은 전라도 동편제를 구사하면서도 발음과 구성 등에서 '충청도 동편제'로 새롭게 불렀던 인물로 알려졌다. 국악계는 충청도 명창들이 대부분 중고제를 고집했는데, 정춘풍 명창 만큼은 중고제와 동편제를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정춘풍 명창이 중고제·동편제·서편제 등 '제(制)'를 넘나들었던 '신(神)'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송흥록의 동편제를 살펴보면 대부분 '호통 창법'을 구사했다. 다른 사람에게 호통 치듯 불렀고, 음색 역시 강하고 선명하다. 전형적인 전라도 지역의 동편제 소리다. 반면 정춘풍 명창의 동편제는 '정가 창법'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가풍은 시조를 읊듯이 노래를 부른 게 특징이다. 충청도 사투리와 매우 흡사한 창법이다. 그는 판소리 사설 등 거의 아무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정춘풍 명창의 특이한 이력은 '양반광대'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신분계층에서 최하위로 꼽혔던 광대, 즉 판소리꾼이 양반출신이라는 점은 후대 학자들에게도 충격, 그 자체다.

그는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했을 정도로 양반 중에서도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났다. 판소리에 빠져있던 그는 벼슬 등에 관심 밖이었다는 게 국악계의 견해다. 그는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며 판소리를 즐겼던 인물로 꼽힌다. 이름 '춘풍'처럼 봄바람과 같이 세상을 즐기면서 생을 그렇게 마쳤다.

노재명 판소리학자는 저서 '꽃피는 중고제 판소리(2016년)'에서 "가왕(歌王) 송흥록을 능가할 정도의 가신(歌神)·가선(歌仙) 평가를 받았던 박기홍을 가르친 대가가 정춘풍 명창이니 그 기량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정춘풍과 그 수제자 박기홍 모두 언행이나 소리제가 품격이 높고 탈속의 도교적인 색채를 풍긴다"고 적었다.

노 학자는 "중고제 등 충청도의 판소리가 쇠락하다보니, 충청도 출신인 정춘풍 명창은 대중들에게 잊혀졌다"며 "판소리 전체 역사에서 정춘풍이라는 인물은 이론과 실제 소리에 두루 능해 노래의 신을 길러낼 정도로 접신의 경지였던 만큼 이론가 신재효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판소리 대가로 부르고 싶다"고 설명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고교 당일 급식파업에 학생 단축수업 '파장'
  2. 대전 오월드서 에어컨 실외기 설치 작업자 추락해 사망
  3. 열악했던 대전 여성노숙인 쉼터…지원 손길로 '확 달라졌다'
  4. "뿌리부터 첨단산업까지… 지역과 함께 혁신·성장하는 대학"
  5. 대전 중구 교육부 평생학습도시 신규 선정 '중구가 대학, 온마을이 캠퍼스'
  1. 대전교사들 "학교 CCTV 의무화, 사건 예방에 도움 안돼" 의무화 입법에 반발
  2. 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3. 대전 금고동 주민들 "매립장·하수처리 공사장 먼지에 농사 망칠판" 호소
  4.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5.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헤드라인 뉴스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탄핵정국 속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4·2 재보궐선거 본 투표 당일인 2일 시의원을 뽑는 대전 유성구 주민에게선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발현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저마다 투표소로 향한 것이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유성구제2선거구의 온천2동 제6투표소 대전어은중학교는 다소 한산한 풍경이었다. 투표 시작 후 4시간이 흘렀지만 누적 투표수는 고작 200표 남짓에 불과했다. 낮은 투표율을 짐..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약 9500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40대 차주의 평균 대출 잔액은 1억 1073만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53만 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1인당 대출 잔액은 지난 2023년 2분기 말(9332만 원)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했다. 1년 전인 2..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 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 한산한 투표소 한산한 투표소

  •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