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 학장 |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되었으며,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계획하는 등 조선의 국운은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치달아 국권이 흔들리고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자발적 개항이 아닌 일본의 외압에 의한 후속적 조치였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은 국제무대에 눈을 돌리는 출발이 되었으며, 서양에 문화가 개방되고 신문명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이 시기는 문호 개방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 및 수구파의 임오군란과 개혁파의 갑신정변 외에도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이 연이어 발생한 격동의 구한말이었고 아직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은 근대 한국 역사의 현장이었다.
한편, 언어의 근대화는 언어의 규범화와 상관관계를 갖게 되고 언어의 규범화는 필연적으로 언어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수반되고 표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 결과로 언어의 지위가 확정되어 한 나라의 국어로서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대 계몽기라고 말할 수 19세기 후반에 전개된 일련의 어문 운동은 맞춤법 및 표준어 정리에 집중되었으며,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한 성경 번역 및 한글 보급의 확산을 통해 언어의 근대화 과정이 이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글이 근대적 전환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어 의식을 형성해 나갔다.
즉, 19세기 후반기는 혼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어가 언어 간 접변에 놓여 상대화되면서 한국어가 관찰되고 교육되었으며, 역설적으로 한국어의 외연이 확대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본격적인 연구를 했다기보다는 선교를 위한 목적에 한국어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입장에서 필요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서양인의 한국에 대한 관찰 기록으로 주목할 것은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Hamel)이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다가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착하면서 시작한 14년 가까운 억류 생활을 기록한 『하멜 표류기』이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종교, 교육에 대한 내용을 관찰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체계적인 기술이 시도된 것은 19세기에 독일 출신의 네덜란드 의사인 지볼트(Seibold)가 조선의 언어를 수집하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양인의 한국어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이 시기에 한국어에 대한 자료로서 주목할 것은 메드허스트(Medhurst)가 1835년에 편찬한 『朝鮮偉國字彙』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하였던 메드허스트가 『왜어유해』와 『천자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여기에 나타난 조선의 어휘를 모아 놓은 것으로 이후 서양인의 한국어 학습서 편찬에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사제들과 뒤이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어가 관찰되고 한국어 학습서가 편찬되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서양인에 의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관찰이 기록된 시기로 한국어 교육의 맹아적 단계라고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어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어교육의 양적 성장과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때에 한국어교육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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