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을 일컫는 말이다. 송나라 진덕수(陳德秀)가 꼽았다. 당나라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이 그들이다. 그 중 소순, 소식, 소철은 따로 '삼소(三蘇)'라 불렀는데, 소순이 슬하에 소식과 소철 두 형제를 두었다. 삼부자가 탁월한 문장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니 놀랍지 않은가?
큰 아들 소식의 호가 동파이다. 소동파(蘇東坡, 1036 ~ 1101, 중국 송대 시인)로 너무도 우리 귀에 친숙한 이름이다. 유배지였던 창강에 배 띄우고 적벽을 선유하며 지은 시 적벽부(赤壁賦)로 유명하지 않은가? 명창 이창배(李昌培, 1916 ~ 1983, 중요무형문화재 19호)가 원문에 토만 달아 부르기 좋게 만든 서도민요 적벽부가 있다. 고종 때 명창 장정열이 지은 단가 적벽부 역시 널리 불린다.
소동파가 동생 소철과 '민지'라는 연못에서 놀며 자랐나 보다. 동생 소철이 쓴 시에 화답한 시 '민지에서 옛일을 생각하며 자유에게 답하다(和子由?池懷舊)'가 전한다.(자유는 소철의 자이다.)
이리저리 떠도는 인생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응당 나는 기러기 눈뻘 밟는 것 같네
진창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겼어도
나는 기러기 동서 어디로 갔는지 어찌 알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로운 탑이 서고
벽은 무너져 옛날 적은 시 볼 수가 없네
지난날 험한 길 기억 하지 않는가
먼 길 사람 지치고 절름발이 나귀 울부짖네
(人生到處知何似 / 應似飛鴻踏雪泥 / 泥上偶然留指爪 / 飛鴻那復計東西 / 老僧已死成新塔 / 壞壁無有見舊題 / 往日崎嶇還記否 / 路長人困蹇驢嘶)
얼마나 쓸쓸하고 애잔한가? 덧없이 떠돌던 인생길이 멀고 험하기만 하다. 인생이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다고 읊는다. 어쩌다 발자국 남겨도 처음엔 선명하게 자취가 남지만, 녹아내리는 눈과 함께 점차 사라진다. 얼마나 빨리 녹고 천천히 녹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스쳐가는 바람이긴 마찬가지다. 말이 좋아 호사유피(虎死留皮)지 날아간 곳조차 알 수 없다. 흔적조차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리에 연연한다.
한학자이며 서예가였던 변시연(邊時淵, 1922 ~ 2006) 선생은 좌우명이 삼지(三知)였다. 족함을 알아야(知足)하고, 분수를 알아야(知分)하며, 그칠 줄 알아야(知至) 한다. 그칠 줄 안다는 것은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걸음마를 열심히 배우지만 그 속엔 멈춤의 지혜가 숨어있다. 멈추지 않고 걸을 순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옛사람 말에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 않았는가?
나아가고 물러남, 나타내고 숨기는 것이 잘못되면 만사가 도로아미타불이요, 패가망신(敗家亡身)하게 된다.
중국 한나라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을 도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나라의 기틀까지 마련하였으나 물러나 은둔하여 목숨을 건졌다. 춘추시대 월나라 범려(范?)는 월왕을 도와 오를 멸망시키고 패업을 이루었으나, 그 유명한 토사구팽(兎死拘烹)이란 말을 남기고 떠나 생명을 보전했다. 진퇴 따라 생사가 엇갈리는 경우는 역사에 허다하다. 오뉴월 화롯불도 물러나 앉으려면 아쉬운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새가 오래 앉아 있으면 화살 맞는 법임도 알아야 한다.
양동기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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