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민주의거 60년사에 수록된 사진. 1000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관과 대치하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
이승만 초대 대통령 집권 말기였던 1960년. 학교는 교육의 요람이 아닌 편향된 정치를 주입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학교에는 대통령 사진을 게시하고, 정부 기관지나 마찬가지던 ‘서울신문’을 각 학급에 강제 구독하게 했다. 조례 때에는 교장이 야당인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세태 속에서 학생들은 정부의 의도처럼 편향된 이념이나 정치 선동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권을 연장하려는 독재에 분노했고, 학교의 자유를 가로막는 강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60년사에는 당시의 생생한 정황이 담겨 있다. 김용재 기념사업회장은 "5교시쯤 됐을까.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교실을 돌며 나가자! 우리는 젊은 학도 부정부패와 싸우자! 학원의 자유를 찾자! 등을 외쳤고 마침내 울분의 함성으로 변했다…(생략)… 맞고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우리가 찾는 민주주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신문에도 그날의 기록은 남았다. 대다수 신문은 이 상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정권은 학생들의 돌발 데모가 정치적 배후가 있을 것이라며 호도하려 했다. 그러나 신문은 자유당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고 부정선거의 실태를 보도하며 분위기를 상세히 전달하는 ‘정론직필’을 보여줬다.
사설과 후속보도로 3·8 민주의거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도일보 신문. 3·8이후 대전상업고등학교에서 3월10일 또 한차례 의거를 일으켰다. 중도일보 1960년 3월 11일자 3면. |
또 “사설의 경우 '학생은 초연한 입장에서 자중하라'는 제목이었지만, 내용은 ‘학생데모를 계기로 학생과 관계 당로자(중요한 지위나 직분에 있는 사람)들이 냉정하게 자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3·8의거는 대전정신이다.
의거 당시 대전고 학도호국단 기율부장이자 4·19혁명 공로자인 최정일 선생은 "대전과 대구, 마산의 고등학생 항거는 울분과 분노로 가득 찼던 시민과 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마침내 정권을 무너트린 혁명의 역사를 이룩했다"고 의거의 의미를 확고히 했다.
1962년 5월 건립된 대전고 헌정탑과 |
대전시는 3·8정신을 계승·발전하겠다는 세부 계획안을 내놨다. 기념관 건립 사업은 지난 4일에야 원안 가결했고, 아카이브를 비롯한 세부계획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뗐다. 그러나 시민정신 확립을 위해서는 3·8의거가 발단이 된 민주화 역사를 범대전시민 역사교육으로 확장해야 하고, 지속 가능한 기념사업회로 운영할 수 있도록 구성에도 다변화를 줘야 한다는 과제는 이제 시작이다.
허태정 대전시장은 "3·8민주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인 된 충청지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의로운 기개와 용기로 분연히 일어서 독재와 불의를 거부하고 시대적 소명인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열고자 앞장선 자랑스러운 '대전정신'"이라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3·8민주의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과 함께 모두 함께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해 주는 만큼 시민 모두가 그 숭고한 정신을 오롯이 기억하고 계승해 코로나19 극복의 원동력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이해미 기자 ham7239@
왼쪽부터 3·8민주의거 진원지 표석과, 명예도로명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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