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3월 8일 이후에도 이 사진은 생각 못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날의 힘과 에너지가 폭발해 3·8의거까지 이어졌구나 했다. 체육대회로 단결돼 있지 않았다면 3·8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1960년 대전고등학교 학도호국단 대대장 박제구(당시 2학년, 1940년생) "3월 8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그때 의거가 성공적으로 잘 됐다면 4·19도 5·18도 안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전고 학생들의 피해는 컸을 수 있겠죠"라고 회상했다.
1960년 대전고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자 3.8 민주의거로 4.19혁명 유공자로 표창을 받은 박제구 선생. 1959년 12월 8일 체육대회 우승 기념사진을 들고 있다. |
박제구 선생은 "7일 날 보문고 친구네 집에 모여서 사전 모임을 했다. 하룻밤 만에 결의문과 시위의 목적을 논의했다. 의거는 8일 하교 후였는데,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7일 날 모의했던 것이 발각됐다"고 말했다.
이어, "박관수 대전고 교장은 대대장인 나만 잡아두면 시위를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거 같다. 교장 관사 안방에 붙잡아 두길래 기율부장 최정일이 너는 여기 있어라. 내가 갈게 하더니 교장 사택 울타리를 넘고 이미 대기하고 있던 대전고 학생들과 거리로 나아갔다"고 정황을 설명했다.
쏟아져 나온 학생 일부는 교문에서 대열을 짰고, 300여 명은 교장 사택으로 와 "박제구 나와라"를 외치며 3·8의거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하지만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연설이 예정된 공설운동장으로 가는 시위대에 박 선생은 함께하지 못했다. 교장 사택에서 나와 대열에 합류하려 했으나, 선생들이 박 선생을 붙잡고 막아서는 바람에 시위대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체됐다.
박제구 선생은 몇몇 친구들이 빠져 있지만 당시 대전고 모두가 3.8민주의거에 참여한 동지이자 영웅이라고 했다. 단기 4292는 1959년으로 사진을 촬영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3.8민주의거가 일어났다. |
하지만 박제구 선생의 나날은 편치 못했다. 박 선생은 "박제구의 증언에 따르면 불순분자의 지시를 받았다는 날조들이 신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당시 나를 찾아온 신문 기자는 단 1명도 없었다"고 했고 "그 뒤에 비슷한 시위만 생기면 내가 주동한 것으로 의심을 샀다. 의거 후 60년이 지났는데 40년은 편히 살지 못했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 들어 분위기가 바뀌면서 나아졌다"고 했다.
박제구 선생은 1963년 박정희 정권 당시 4·19 포상을 받았다. 100여 명 가운데 15번으로 포상을 받았는데, 3.8 의거 가운데는 대전고에서는 4명만이 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제구 선생은 "요즘 젊은이들 참 잘하고 있다. 다만 약간의 기백이 부족한 것인데, 그 부분만 채운다면 좋겠다. 3·8을 대전의 시민정신으로 계승하겠다는 대전시에 고맙다. 이 정신을 살려 잘못된 건 고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제구 선생은 8일 제61주년 3·8민주의거 기념식에서 편지를 낭독한다.
이해미 기자 ham7239@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