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 : 處(살 처/머물다) 善(착할 선) 之( ~의, 관형격 조사) 勇(날쌜 용)
출 전 : 조선오백년야사(朝鮮五百年野史)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비 유 :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을 알면서도 불의에 맞서 바른말을 하는 용기
처선지용(處善之勇)은 조선 연산군 시절 내시(內侍) 김처선(金處善)의 불의(不義)에 대응한 강직한 행동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최고의 암군(暗君)인 10대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성품이 날로 포악(暴惡)해지고 방탕(放蕩)이 극(極)에 달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직언(直言)을 했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뻔했으므로 아무도 말을 못하고 오히려 아첨(阿諂)만 일삼았다.
이러한 때 환관 김처선(金處善, ?~1505)은 나라 꼴이 이 지경인데도 아무도 용기 있게 나서서 간언(諫言)하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이 죽음으로써 이 잘못된 군주의 불의(不義)의 행동을 바로잡을 결심을 하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입궁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 그리 알라."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연산군은 많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창안한 음란한 놀이 처용희(處容戱)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이미 각오한 김처선이 분연한 자세로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늙은 놈이 지금까지 일곱 분의 임금을 섬겼고, 글도 조금 읽었습니다마는, 고금에 전하와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부디 이성을 찾으시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푸시옵소서!"
배석했던 대신들은 질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같이 노한 연산군이 김처선을 향해 직접 활을 쏘니 화살이 그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래도 그는 의연하게 말했다.
"늙은 내시(內侍)가 어찌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용상을 지키시지 못할까 봐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더욱 화가 난 연산군은 이번엔 김처선의 다리를 쏘았다. 그가 쓰러지자 연산군이 소리쳤다.
"일어나서 걸어라. 어서 걸으란 말이다!" 김처선은 연산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 다닐 수 있습니까?"
그래도 김처선이 간(諫)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자 연산군은 그의 다리와 혀를 자르게 하여 죽이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가족들까지 참수하고, 그래도 모자라 그의 부모의 무덤까지 파헤치게 했다.
김처선은 비록 환관(宦官)이긴 했으나 참다운 용기를 지닌 진정한 신하(臣下)였다.
내시 김처선의 본관은 전의(全義/지금의 세종시)이고 그는 내시로서 세종 때 입궁하여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다.
문종 때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단종 때 귀양이 풀리고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단종 3) 정변에 관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었다.
세조 때 다시 복직되어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다시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성종으로부터는 전어(傳語: 통역)에 공이 있고, 의술을 알아 대비의 신병 치료에 이바지하였다고 하여 가자(加資)되고 상급을 받기도 하였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그 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시종에 임하였으나 직언(直言)을 잘하여 미움을 받던 중 1505년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비행을 직간하다가, 연산군에 의해 직접 다리와 혀가 잘리고 죽음을 당하였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양자인 이공신(李公信)과 7촌까지도 연좌시켜 처형하고 본관인 전의(全義)도 없앴다.
그리고, 조야(朝野)에 명하여 '處(처)'자(字)와 '善(선)'자(字)를 이름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약 250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동양의 철인(哲人) 장자(莊子)는 '곧은 나무가 먼저 베어지고, 맛있는 샘물은 먼저 마른다.(直木先伐 甘井先竭/직목선벌 감정선갈)'라고 했다.
같은 의미이지만 당태종(唐太宗)의 언행록이라는 오긍(吳兢)의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木從繩則正 君從諫則聖/목종승즉정 군종간즉성)'이라 했다.
요즈음 최고 권력에 맞서는 참다운 인재를 보게 되어 신선함을 더해 준다.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국민 편에 서서 온갖 고초를 감내하는 최감사원장, 윤검찰총장, 신청와대 민정수석 등이 대중에 많이 회자(膾炙)되는 까닭은 정의를 위한 맡은 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용기와 소신 있는 업무수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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