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소음이 너무 지나쳐, 참다 참다 찾아가 자제 요청했더니, 그럴 소지가 없다며 딱 잡아떼더란다. 듣던 다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이가 뛰어놀아야 한다면 매트라도 깔면 어떠냐고 했단다. 그랬더니 돈 없어 못 깐다며 도리어 화내더란다.
지난 1월 층간소음 갈등에 휘말린 유명연예인도 화제였다. 아이가 뛰어노는 것을 막는다고 막아 지랴. 한 집에서는 바닥에 매트를 깔아놓았던 모양이다. 아이에게 주의도 주고 조심도 하였는데 항의가 지속 되자, 방음방진 시설을 새로이 맞췄단다. 나름대로 조치 취했던 한 집도 방법이 없어, 층간소음 문제가 덜한 곳으로, 아예 이사한다고 한다. 마음껏 뛰어노니 아이 아닌가?
주민 상호 빚어지는 불편이나 갈등 문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강화된 국민건강진흥법, 주택건설 기준이 마련되었으나 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다. 거기에 코로나19로 인하여 집에 갇히다 보니 이웃 간 갈등 소지가 더 많다. 너나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우울해지고 신경이 곤두선다. 고운 음악도 소음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양보와 배려가 더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
돌이켜 본다. 현재 사는 집에 이사 오고 보니 창문 넘어 놀이터가 있어 좋았다. 사시절 재잘거리며 떠들고 웃는 소리와 뛰어노는 모습이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밖에 일이 있어 승강기에 오른다. 승강기 안에 중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타고 있다. 승강기에서 아이 만나는 것도 코로나-19 덕 아닐까? 생각 중에, 여기에 사시느냐며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고 했더니, 피아노 소리가 시끄럽지 않으냐며 죄송하다고 한다.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까지 숙인다. 그러고 보니 자주는 아니지만, 창밖에 서성이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떠오른다. 배려할 줄 아는 아이가 무척 의젓해 보인다. 연주 공부는 반복 연습이 거의 전부다. 연습실이 없으면 실력이 늘기 어렵다. 음악이 좋단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연주해라.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래전 필자가 환경교육센터에서 일할 때 얘기다. 대전에 있는 한 대학 학생들이 국토순례를 하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센터에서 일박하며 활동을 정리하는 일정이 있었다. 오후가 되자 먼저 교직원들이 찾아 왔다. 센터에는 샤워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함에도 대야와 몇 가지 기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학생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었다. 마당에 대여섯 개의 의자와 대야가 준비되었다. 호스로 수돗물도 마당으로 끌어냈다. 물이 가득한 대야를 의자 앞에 놓고, 총장을 비롯한 보직 교수로 보이는 사람들이 허벅지에 수건 올리고 마당 바닥에 늘어앉았다.
학생들이 하나둘 도착하자 의자에 앉힌 다음,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정성스레 발을 씻긴다. 수건으로 물기도 깨끗이 닦아준다. 닦아주는 사람도 닦이는 사람도 서로의 배려와 위무에 얼굴이 환하다. 순간 온갖 고단함이 사라진다. 온몸에 활기가 돋는다. 나누는 사랑에 긍지와 자부심이 샘솟는다.
채플 시간이었는지, 종교 과목 수강할 때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가 제자 발 씻어주는 대목이 나온다. 제자 앞에 무릎 꿇고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긴다. 예수의 손길이 제자에게 영적 성화를 시켜준다고 한다. 몸 안팎에 있는 사악한 무리를 모두 씻어 낸다. 뿐만이 아니라 새로이 들어오려는 악귀를 막아준다. 14절에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한다. 무지렁이가 13장 말씀의 함의나 가르침 모두 알 턱이 없다. 그랬구나, 생각되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시험 볼 때이다. 숙소가 마땅치 않아 서울 사시던 막내 외삼촌 댁을 찾았다. 와우산 등성이라 고개 넘어 대학과도 아주 가까웠다. 합격자 발표 때까지 보름여 묵게 되었다. 외숙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외삼촌이 퇴근하면 대야에 물 받아 외삼촌 발을 씻겨 주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랐지만, 그저 사랑이 참 깊은가보다 생각했다.
우리 몸 제일 낮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발이다. 몸 전체를 지탱하고 움직이는데 어떠한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역할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하다. 종일 신발에 갇혀 땀 냄새가 배고, 피곤으로 찌든다. 그러함에도 보통 위에서부터 중요하게 인식한다. 자신으로부터조차 제일 홀대받는다.
가까이 함께 살아 이웃이다. 너나없이 삶의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다. 이웃을 홀대받는 발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사랑은 존중이기도 하다. 존중의 첫걸음은 겸손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다. 낮춤은 상대를 섬기는 일이다. 제일 어두운 곳, 외진 곳을 위무함이 참사랑이다. 상호배려가 어렵고 사랑이 쉽지 않으면 초월하면 어떨까? 자신에게 집중하면 그런 것쯤이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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