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진 부장 |
그 텔레비전에는 문이 있다. 나뭇결이 있는 녹색의 문이다. 문을 양옆으로 열어야 화면이 나온다. 요즘의 영화관처럼 커튼이 열리면 스크린이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문을 열면 우측에 채널과 소리를 조정하는 동그란 모양의 손잡이가 있다. 너무 빨리 돌리거나 세게 돌리면 어김없이 손잡이가 부러져 빠진다.
그 당시 대표적인 반공(反共) 만화인 ‘똘이장군’을 빠짐없이 봤다. 똘이장군과 함께 텔레비전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게 바로 ‘KBS’였다. 그 이후 중·고교 때에도 TV를 많이 봤을 테지만, 딱히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대학 때 만난 TV 속의 모든 방송은 하나같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정치적 편향을 노골적으로 내보냈다. 그래서인지 기억나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TV를 자주 보고, KBS를 즐겨 본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세상의 변화와 흐름에 주목하고 여러 분야의 움직임에 시시각각 대응하다 보니 신문과 함께 방송뉴스를 보는 것도 거의 일상이었다.
뉴스 다음으로 애착을 둔 건 채널 9번에서 나오는 KBS 대하(大河)드라마인 정통 사극이었다. 2000년대 들어 방영한 KBS 사극은 빠지지 않고 봤다. 홈페이지 회원으로 가입해 놓쳤던 회차는 ‘다시보기’로 챙겨봤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엔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대왕세종,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정도전, 징비록 등과 보냈다고 할 정도다. MBC나 SBS는 물론 JTBC 등 종합편성채널에서도 여러 사극을 방영했지만, 조금 보다가 접었다. 대부분 퓨전 사극이라 KBS 9의 정통 사극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그런데 KBS 정통 사극의 역사가 단절된 지 오래다. 언제가 마지막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다. 정통 사극이 끊기면서 KBS와도 멀어졌다. 물론 시대 변화에 따른 다양한 프로그램도 많지만, 개인적으로 정통 사극과 교양 외에는 거의 보지 않는다. 정통 사극은 케이블의 재방송으로 위안을 삼고, 뉴스는 조금이라도 빠른 MBC나 SBS(TJB) 8시 뉴스나, 항상 뉴스가 나오는 뉴스전문 채널을 본다. 교양이나 다큐멘터리는 EBS가 좋고, 영화나 골프는 케이블로 즐긴다. 유튜브 등에 익숙한 10대∼30대는 더 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니 정작 매월 수신료를 내는 KBS를 볼 일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 물론, 공영방송으로서 역할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구성원의 피와 땀이 지금의 KBS를 지켜왔지만, 아마 필자와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수신료 납부를 명시한 방송법 제64조에 대한 논란이 커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신료 제도는 1963년에 제정한 시행령이다. 너무 오래되긴 했다. KBS가 ‘60년 만에’를 강조하며 수신료 인상에 또다시 도전장을 던졌지만,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최근 2020년 기준으로 KBS 내 억대 연봉자가 46.4%이고, 무보직자가 1500명에 달한다는 KBS의 ‘비자발적 고백’은 오히려 화를 키우기도 했다.
물론 재난방송의 컨트롤타워와 KBS 지역총국의 뉴스 확대 등 새로운 시도와 자구 노력은 돋보인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예전처럼 ‘기분 좋게’ 수신료를 내고 싶다. 한국전력 전기요금 청구서 내역의 끝자락에 묻어가는, 당당하지 않은 수신료가 아니길 바란다.
윤희진 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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