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상황,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던 일이 점점 멀어져 간다. 가물가물해진다. 전망도 밝지 않다.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연내 난망인 모양이다. 일부 현상은 고착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독서와 창작으로 보내는 사람이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질 것도 없다. 한가지 만남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다. SNS가 전부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삶의 함정 중 하나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장벽 안에서 작은 창으로 세상을 내다 본다. 근거 없는 믿음을 갖는다. 소위 확증편향이다. SNS는 그것을 더욱 부추긴다. 좋아하는 것만 보게 된다. 더구나 SNS가 사용자 선호도 체크 기능을 확대, 개별 성향 고착화를 가속 시킨다. 이용자가 많이 검색하고, 주로 보는 것을 모아서 우선 보여준다. 자기도 모르게 편식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아도 정보 홍수 속에 산다. 선택 폭이 넓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좁아진다.
오늘날 사회현상의 하나인 흑백논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다. 다른 견해에는 절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토론이 없으니 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는다. 거기에 오프라인까지 가세한 것이다. 변함없이 산길에는 사람이 많다. 달라진 것이 있다. 온화한 얼굴과 다정하게 건네던 인사가 사라졌다. 인사말은커녕 스치는 것조차 꺼린다. 나아가 멀리서부터 서로 경계한다. 심지어 외면한다.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미래에도 사회적 동물임은 변함이 없지 않겠는가? 상호작용 속에 너와 내가 있다.
타개 방법이 무엇일까? 여타 상황과 다르지 않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진선미를 최고 가치로 생각해온 지 오래다. 형상만이 아니다, 무형의 가치도 다르지 않다. 그의 추구가 인류 역사 아닌가? 진리, 윤리, 아름다움에 경중이 있겠는가? 단지 그 정의와 해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아름다움을 보자. 예술사조에 유미주의가 있다. 심미주의, 탐미주의라고도 한다. 여타 조건을 배제한 순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가장 지고한 가치로 본다. 대상 모두 미로 평가한다. 그에서 쾌감을 얻는다. 미적 쾌감이다. 그러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름다움만 추구하던 시대를 지나, 진실하고 착한 것이 아름다움이 되었다. 기괴하고 섬뜩한 것도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현대예술에서 아름다움은 작가 자신 생각과 느낌을 포함하는 독창성과 새로움이다.
석도(石濤, 1641 ~ 1720, 중국 청시대 회화이론가)에 대한 조송식(미학박사, 산수화의 미학)의 견해이다. "석도에게 예술은 사소한 도가 아니다. 예술은 교훈의 수단이 아니라 예술 행위 자체가 목적이고, 자아완성의 수행이며, 성인이 되는 학문이다. (중략) 석도에게 그림은 예술 행위이고, 도의 실천이며, 진정한 인간 완성의 실현이다. 이것은 바로 나를 위한 그림, 나를 즐기는 그림으로 귀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을 성인이 되는 학문이요, 인간 완성의 실현으로 보았다. 자신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과정이 예술 행위라 주장한다. 진선미 모두를 포함한다.
예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술이 선도했다고 보는 것이 오를 것이다. 모든 행위에서 독창성과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면에 스스로 즐기기 위한 것이다. 거기엔 우열과 가치의 대소가 없다. 국가를 책임지는 일이나 작은 일이나 중요성이 다르지 않다.
김형석 교수 인터뷰 대목이다. 생각을 보태 요약하면, 행복해지기 어려운 부류가 둘 있다. 하나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기주의자다.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물질을 많이 가지게 되면 오히려 불행해진다. 사람이 추구하는 돈, 권력, 명예는 기본적으로 소유욕이기 때문이다. 욕심에는 만족이 없다.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만족을 알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자는 자신만을 위해 산다. 이기주의자는 책임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 인격은 없다. 공존의 가치, 존엄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와 행복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배려가 없으면 늘 불안에 시달린다.
정신적 가치는 논리적이고 윤리적이며 심미적인 진선미에 종교적 가치를 더한다. 그 가치를 진중하게 고양 시키고 스스로 즐기는 것이 미래사회 우리 모습 아닐까? 따라서 늘 새롭게 해야 한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정신이 늙는다. 다시 철학자의 말이다. 몸 따라 정신이 늙는 것이 아니다. 몸이 정신을 따라온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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