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늘 문제의식에 사로잡힌다. 거기에서 화두가 일고, 성찰과 사유를 통해 창작에 임한다. 표출 양식의 낯설거나 익숙함, 표현방법의 세련 여부를 떠나, 한 작가의 심혈이 담긴다. 따라서 작품의 우열 가리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그러함에도 끊임없이 품등을 정한다. 결국 선악(善惡), 정오(正誤), 진위(眞僞), 미추(美醜)가 아닌 가치판단 기준의 문제로 귀결된다. 보는 사람의 선호도 문제다. 나름의 작품성과는 별개다. 타인의 억압과 자승자박에 자기도 모르게 얽매인다. 관념의 벽을 포함 그 벽에서 탈주하지 못하면 수작 기대가 어렵다.
자연에 완전한 흑백이 존재하지 않듯, 절대 자유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선의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몬도가네'를 오래전에 본 기억이다. 때로는 참혹하고 난폭하며 해괴하고 엽기적인 내용을 전한다. 거기에, 누드로 온몸에 페인트 바른 여인의 두 다리를 작가가 붙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장면이 있다. 여인이 춤추듯 끌려다니니 캔버스에 다양한 흔적이 남는다.
액션페인팅으로 잘 알려진 작가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작업하는 광경이 친견하기 어려웠지만, SNS 발달 덕에 동영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 흘러 떨어지는 것으로 자유로이 그려나간다. 그린다기보다 흘린다. 잠시 멈추고 이리저리 뿌리기도 한다. 물감통에 작은 구멍을 내 흘리기도 하고, 통째 들어붓기도 한다. 드립 앤 스플래시(Drip and Splash, action painting) 기법이라고도 한다. 캔버스 가로 돌며 반복한다. 잘 흐르도록 상대적으로 묽은 에나멜페인트를 사용하였다 한다. 모래, 유리, 담배 조각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 용해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화가의 내면이 흔적으로 남는다. 즉흥성을 강조하는 평자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는 자연이다", "나의 행동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우연성을 기반으로, 우연을 가장한 질서이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의식의 발로이다. 여타 작가가 의도적인 것에 수반하는 우연으로 작업한 것과 반대이다. 의식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알코올 힘을 빌리기도 했다. 작품뿐 아니라 행위의 자유를 통하여 자유로움을 구현하려 했다. 그러면서 미의 요소인 균형, 변화, 통일을 만들어냈으며 역동적이기까지 했다.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미술 진보 운동에 정점을 찍었다'고 칭찬하기도 하였으나, Times 지로부터 '케티즈버그 여행지도 같다'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현대예술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6세기 중국 남제의 사혁(謝赫)이 그의 저서 <고화품록 古畵品錄>에서 주장한 화론육법(?論六法)은 현대까지도 그 영향이 지대하다. 육법은 기운생동(氣韻生動)·골법용필(骨法用筆)·응물상형(應物象形)·수류부채(隨類賦彩)·경영위치(經營位置)·전이모사(傳移模寫)이다. 한국화 전공자라면 누구나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육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노력 또한 꾸준히 있어왔다. 파묵법, 발묵법 등도 그에 해당한다. 발묵법을 시작하였다는 당의 왕묵(王墨)이나 그의 제자 고생(顧生)은 술마시고 반쯤 취해서 손과 발로 또는 먹물을 붓기도 하고 먹물을 뿌리기도 하며 그림을 그렸다. 붓을 휘두르기도 하고 쓸어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머리털에 먹을 적셔 비단에 나동그라져 그리기도 한다. 시조를 읊기도 하고, 풍악을 울리게 하기도 했다. 소리 지르게 하기도 했다. 화면 주위를 뛰어다니며 춤추듯 작업을 하고 먹물의 형세에 따라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그림의 자연스러움뿐만 아니라 작업의 자연스러움까지 강조하였다.
자유로운 창작은 물론, 권력의 힘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어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최북을 소개한 일이 있다. 왕실의 광대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마음이 동하고 흥이 나야 그림을 그렸다. 자유로운 영혼 때문에 화원 자리도 마다했다. 그 역시 술에 기댄 측면도 있어 항상 만취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 육신의 자유뿐 아니다. 작품에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圖)' 등 손으로 그린 지두화 작품이 다수 전한다.
최북뿐 아니라 자유로움, 새로움의 추구는 작가 본연의 소양이다. 붓에서 벗어나고 싶은 지두화만 해도 강세황(姜世晃)·허필(許珌)·심사정(沈師正) 등의 작품이 전하며, 19세기 윤제홍(尹濟弘), 오기봉(吳起鳳)의 작품도 전한다.
역병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방역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존중하고 우선하는 유럽이나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급속히 만연되었다. 누적 확진자 수 상위 10위 내 국가에 아시아 국가는 없다. 최초 발생지인 중국조차 저 아래다. 방역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대만, 베트남을 필두로 확진자 수가 모두 낮다. 자유에 반비례함을 볼 수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만 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자유만큼 소중하고 위대한 가치가 어디 있으랴?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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