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 결정전에서 홍수환과 카라스키야가 맞붙은 장면. /연합DB |
1977년 11월27일, WBA 세계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자리를 놓고 한국의 홍수환 선수와 파나마의 카라스키야 선수는 한 판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카라스키야 선수는 17전 17승 전 K.O승으로 장식한 천하무적의 강자였다. 적지에 가서 싸우는 홍수환 선수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홍수환 선수는 연타로 얻어맞더니 1·2라운드에 무려 4번이나 다운이 됐다.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국민들은 다들 끝난 경기라고 낙담하면서 홍 선수가 몇 회나 더 버텨내겠느냐며 안쓰러워했다.
그런데 3라운드에 들어서자 홍 선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챔피언이 됐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4전5기'라는 말이 있다. 여러 해 전의 일이지만 그 순간의 감동과 기쁨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너무도 기막힌 역전승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질 것을 예상한 시합이었고, 현장에서도 다 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최고의 반전, 최고의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것이었다.
불굴의 투지로 인생 승리자가 된 홍수환 선수의 얘기를 하다 보니 이승과 저승의 기로에서 살려고 발버둥 쳤던 내 대학시절 고학생활이 떠올랐다.
나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생활 4년간 하루 3시간, 4시간밖에 못 자는 생활로 하루에 4파트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래야 내 하숙비, 등록금, 용돈을 마련할 수가 있었고, 거기다 영등포고등학교 다니는 셋째 동생 하숙비와 등록금까지 감당할 수가 있었다. 이런 생활로 나는 수면 부족에 과로로 코피 흘리는 생활이 다반사였다. 힘들고 어렵고 지겨웠던 고생의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남들처럼 낭만을 즐기면서 공부는 못했어도 누추한 차림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코피 흘리던 그 시절이 나를 그립게 하고 있다. 이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절박했던 그 시절 추억의 필름으로 돌아가 본다.
저녁 먹고 공주 의료원 앞 외과 산부인과 병원으로 갔다. 학생 지도를 위해서이다. 병원장 아들과 세종사 책방 아들 사범대 사회과 교수 아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보고 싶구나. 공주사대 부속중 1학년이었던 홍일이, 봉수, 재훈이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삼각함수 문제 푸느라 끙끙대던 모습도, 영어 5형식 문장에 능동태 수동태 화법 문제로 골머리 아파했던 수업시간도 빼놓을 수 없구나. 중학교 입학해서 졸업 때까지 가르쳤던 세 얼굴이 많이도 생각나는구나. 지금쯤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만나도 몰라 볼 정도 변했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싶구나.
장소를 옮겨 학생 가정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것이 두 번째 파트 고등학생 지도를 위해서이다. 수학문제를 풀고 설명을 하다가 평상시 느낄 수 없는 웃음기류를 감지했다. 이상한 기미에 정신을 차려 보니 졸다가 엉뚱한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 지친 몸으로 동분서주하다 보니 체력 감당이 안 되어 빚어진 생리적 현상이었다. 잠을 못 잤으니 의지로 안 되는 깜빡 졸음에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
학생지도 두 파트를 끝내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오면 저녁 11시 30분 전후 시각이 되었다. 다음 날 학생들 가르칠 4파트 분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거기다 중간 기말 고사가 겹칠 때나 리포트를 써야 할 때는 정말 3시간도 자기가 어려웠다.
그 흔한 손목시계 하나 없어서 어림으로 시간을 헤아리며 의지로 싸워야만 했다. 수업 준비에다 공부를 한답시고 앉아 있기는 하지만 거슴츠레한 눈에, 소진된 체력은 책장에다 누런 액체의 침만 흘려 놓는 것이 일쑤였다. 시계가 없으니 새벽녘 나가는 아르바이트는 철두철미한 정신력으로 챙겼다. 꼭 3시간만 자고 일어나야겠다는 정신력으로 무장된 나는 어느 사이에 기계가 다 되어 있었다. 정신력, 습관, 규칙적인 생활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인 내가 기계가 다 됐으니 말이다.
새벽 4시 정도 기상하여 삼흥여객 주식회사 홍사장네 아들을 가르치러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잘 사는 집이라서 대문도 엄청나게 크고 좋았다. 그 때는 지금의 그 흔한 초인종 설치도 안 되어 대문을 두드려야 했다. 대문을 두드린 것이 5분은 됐을 것도 같은데 인기척은 없었다. 어떤 때는 10분 정도 두드릴 때도 있었다. 새벽시간 곤히 자고 있을 때라 문을 두드려도 사람들이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5분 10분 정도 대문을 두드릴 때는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약자의 설움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때는 인생 회의감에 모든 것을 다 팽개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약자의 설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마지막 4번째 파트는 대학 강의가 없는 요일, 비어 있는 시간에 학원 강의를 나갔다.
그 때 강의는 중학교 수학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학원은 반죽동 호서극장 인근에 있는 CSB학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 4파트 아르바이트가 다 끝나는 셈이다.
그 때 나는 설상가상으로 대학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7남매 장남인 나는 150㎝ 단신에 난쟁이란 조롱을 받으며 거지처럼 생활을 했다.
의복은 상의 점퍼에 하의는 박쥐우산 천으로 만년바지를 만들어 입었다. 그것이 사철 옷이며, 겨울 되면 바지 속에 내복 하나만 껴입는 것이 고작이었다. 점퍼차림에 그 흔한 구두 하나 못 신고 운동화 차림으로 지칠 줄 모르는 선수처럼 사철 동분서주하며 뛰었다. 요즈음 그 흔한 손목시계는 찰 생각도 못했다. 밤잠 못 자고 지쳐서 코피는 흘리고 먹는 거 변변찮아 빈혈이 생겨 쓰러지는 것이 일쑤였다.
150㎝ 단신이라 어디를 가든지 난쟁이라는 멸시와 조롱을 달고 다녔다.
이럴 때는 남 크는 키도 못 크게 낳아주신 부모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비관하여 죽고 싶은 때도 있었다.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인생 살맛이 안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붙이고 살 만한 데가 없었다. 인생사 나만 이리 어렵고 힘든 거 같아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심신이 모두 지치고 모든 것이 괴로웠다. 죽으려고 공주 금강다리 몇 번 갔다가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게는 구세주 같은 분들이 주변에 계셨다. 따뜻한 가슴으로 격려해주시고 사랑해주신 분들이 구세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분들의 관심과 사랑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가장 따뜻한 가슴으로 위기를 넘기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인생은 의지의 투쟁이라는 좌우명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느꺼운 감사를 드린다.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지만 부끄러운 것들뿐이다. 전공 공부라야 수업시간에 한 것밖엔 없고, 책 한 권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그의 총 결산이 ' 인생은 의지의 투쟁이다.'라는 좌우명 하나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링에 오른 복싱 선수와 같은 백전 불굴의 투지와 신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학 시절 과로에 잠 못 자는 생활로 빈혈에 쓰러지고 코피를 흘릴 때도, 난쟁이란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을 보면 조금은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자위의 감정에 빠질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홍수환 권투선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던 거 같다. 인생은 권투선수의 복싱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 만사는 홍수환 복서의 역전승같이 최고의 반전 드라마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 !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칠전팔기의 정신만 있으면 음지가 양지되는 것은 시간문제 !
현대를 사는 세인들이여 삶의 무게가 무겁고 힘들어도 힘을 내어서 살아야겠다.
우리 어려워도 4전5기 정신으로 홍수환 복서의 역전 K.O승을 우리도 거두어야겠다.
'인생은 의지의 투쟁'
홍수환 복서도 극적인 역전 KO.승은'의지의 투쟁'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우리 삶의 무게가 무거울지라도'의지의 투쟁'이 음지에서 양지로 가는 길이라면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우리는 힘내어 걸어야겠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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