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만약 손흥민이 토트넘의 홈구장이 아닌 동남아리그의 축구장에서 번리전을 뛰었다면 환상적인 원더골이 가능했을까? 손흥민이 70m가 넘는 거리를 드리볼로 질주하는데 걸린 시간은 12초에 불과하다. 육상선수에 버금가는 엄청난 스피드를 공을 차면서 달리려면 공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굴러가야 하는데 이는 선수 개인의 테크닉과는 별도로 중요한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경기장 조건이다. 제아무리 월드클래스 손흥민이라 하더라도 한강 둔치공원 잔디밭에서 경기를 뛰게 했다면 골은커녕 치명적인 부상을 초래했을 것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구단들은 전문가로 구성된 잔디 관리팀을 핵심 부서로 운영하고 있다. 박지성이 몸담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트 래포드(Old Trafford)경우 잔디 전담 직원만 20명이 넘는다. 다년간의 경력과 전문지식을 가진 이들은 잔디의 생육 상태부터 그라운드의 평탄도, 우천시 배수 등 선수들이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경기장을 관리한다. 토트넘, 아스널, 리버풀, 뉴캐슬 유나이티드, 사우스햄턴 등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구단들도 맨유에 버금가는 수준의 경기장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다. 축구팬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환상적인 골의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잔디 장인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2002월드컵 이후 우리나라의 주요 축구장도 프리미어리그 수준의 사계절 잔디가 깔렸다. 현재 K리그 경기장 22개소 대부분이 FIFA가 권장하는 기준의 잔디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국형잔디와 달리 K리그 축구장에선 '켄터키 블루그라스'를 많이 쓴다. 흔히들 말하는 사계절 양잔디다. 버뮤다그라스, 라이그라스, 벤트그라스 등 다른 품종들도 있지만, K리그에선 캔터키 블루그라스를 최고의 잔디로 인정하고 있다. 가을이면 옅은 황톳빛으로 변하는 한국형 잔디와는 달리 양잔디는 사시사철 푸른색을 유지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고온 다습한 우리나라의 기후에는 매우 약하다.
양잔디는 채광시간과 통풍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축구 전용구장의 경우 대부분 채광시간이 짧고 습한 구조다. 2001년에 준공된 대전월드컵경기장도 마찬가지다. 20년의 세월을 열악한 조건에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해왔다. 올해 8월이면 수십 년간 묵어있던 잔디가 속살을 드러낸다. 잔디의 뿌리를 잡아주는 토양층을 비롯해 배수 시스템, 통풍장치를 전면 개선한다. 시티즌 23년 역사의 숙원사업이기도 하다.
2021년 1부 리그 진출의 꿈을 이룬 대전하나시티즌이 프리미어리그급 경기장에서 홈 개막전을 펼치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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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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