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입장에서, 불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세간에 널리 퍼진 얘기이다 보니,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들기도 했다. 재주 많다고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한정된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는 말이리라. 따져보지 않아도 모든 일을 잘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일의 종류에 따라 접근이나 실행 방식이 다르지 않을까? 결국 선택의 문제 아닐까? 강변하곤 했다.
깊기만 하면 작은 우물이 된다. 넓기만 하면 강이, 넓고 깊으면 바다가 되는 것이다. 깊은 우물은 물이 마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세상이 너무 좁다. 수량이 많지 않으면 멀리 가지도 못한다. 강은 기후나 주위 영향을 많이 받아, 물길이 쉽게 바뀌고 마르기도 한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한다. 헤아릴 수 없는 넓이와 깊이를 갖는다.
선택과 집중, 안배의 문제 아닐까? 효율적인 힘의 활용이랄까? 경영학 공부할 때 메모했던 이야기가 눈에 띈다. 기업의 존재 이유가 고객이며, 목적이 시장이라 정의한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1909.11.19. ~ 2005.11.11.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경영학자)의 에너지 활용법이다. 개인이나 기업 모두 성공하려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 또는 반드시 해야 하는 부분에 85%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라. 10%는 좀 더 새로운 분야, 나머지 5%는 가장 약한 분야에 사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세상일이 반드시 계량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꼭 적용되지도 않는다. 다만 우선순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가지가 탁월하며, 다른 일도 잘한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공감의 시대 상호 이해 도구가 되기도 한다. 더구나 미래사회, 종신 직업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 우세하다. 직업뿐이랴? 도래한 노령화 사회, 인생의 절반을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고민해야 한다.
일하다보면 일의 양만큼이나 실수나 실패도 한다. 흠결 또는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것이 많을수록 당연히 신뢰도 잃는다. 누구나 겪는 일이다보니 많은 사람이 믿음을 인생의 좌표로 삼는다. 신뢰란 덕목이 일의 선택이나 실천력보다 더 중요하다. 성인에서 무지렁이, 작은 일에서 커다란 일에 이르기까지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치인이 많이 인용해온 말이 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전후 문맥을 따져 볼 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백성의 신뢰란 말이다. 신뢰 없이 나라도 정치도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설 수 없다, 바른 정치가 아니란 말이다.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식량이 족하고 군대가 충실하게 하며 백성이 믿게 하는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이 셋 중에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버려야지.' 자공이 또 물었다.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려야지. 자고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다.'(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논어(論語) 〈안연(顔淵)〉》)"
목자는 늘 배려하고 이해하며 베풀어야 한다. 다양한 욕구를 가장 조화롭게 엮어내야 한다. 신뢰가 중요한 덕목이다. 신뢰 받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솔선수범하고 믿어 주어야 한다. 당장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보다 멀리, 보다 높이, 보다 넓게 숲을 보아야 한다. 소위 비전이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자신의 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핑계대지 않아야 한다.
국가나 사회, 지도자뿐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 역시 깊고 넓어야 하며, 진실 되어야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인간 아닌가? 우리의 심각한 오류 중 하나가 실존이 아닌 자타에 의해 임의로 규정되고 판단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남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산다. 최선의 도구가 신뢰이다. 진솔한 훔치기,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새해에는 세상과 상호 마음 훔치기에 전념해 보자.
양동길/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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