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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동지는 금요일이었다. 어떻게 정확히 기억하냐고? 휴일에 우연찮게 절에 들렀다 팥죽을 먹었기 때문이다. 휴무인 그 날도 아침을 먹고 보문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산 아래 조그마한 절이 있는데 사람들이 들락날락했다. 평소엔 쥐죽은 듯 조용한 지라 뭔 일인가 싶어 기웃거렸다. 동짓날 법회였다. 나는 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맙소사, 법당은 만원이었다. 불자들은 주지스님의 불경 소리에 맞춰 일어났다 엎드렸다 절을 하느라 바빴다. 나도 방석을 하나 깔고 대충 따라했다. 부처님께 빌면 복을 받지 않을까, 얄팍한 생각에서였다. 아니 절실한 마음도 우러나왔다. 이 어리석은 중생 부디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하고 말이다. 그런데 마룻바닥이 냉골이었다. 발도 시리고 좀이 쑤셨다. 중간에 나오자니 금빛 찬란한 부처님의 부릅뜬 눈이 쏘아보는 것 같아 애먼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조바심을 냈다.
법회는 12시 조금 안돼 끝났다.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지하 식당에서 팥죽 먹고 가라고 했다. 한 눈에 봐도 내가 어쩌다 들어온 땡땡이 불자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난 팥죽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뎅 대접에 담긴 팥죽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뜨끈한 팥죽을 먹자 얼었던 몸이 녹으며 온기가 퍼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팥죽이었다. 팥을 듬뿍 넣어 아주 진했다. 죽 한 숟갈, 동치미 한 숟갈. 입 안에서 진미의 열락이 피어올랐다. 새알심은 어찌나 쫀득한 지 입천장에 짝짝 들러붙었다. 프랜차이즈 죽집에서 파는 밍밍한 팥죽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돈 맛에 찌든 기업가의 타락한 영혼이 만든 음식이 오죽할까. 한 그릇 뚝딱 먹고 더 먹었다. 그런데 나갈 때 팥죽 두 봉지를 또 안겨주는 게 아닌가. 난 부처님의 태평양 같은 마음에 감동해 지갑을 탈탈 털어 시주하고 나왔다.
어릴 적만 해도 동지가 되면 으레 팥죽을 먹었다. 동짓날 팥죽은 일단 헛간, 장독대, 대문 앞에 한 그릇씩 잠깐 놓았다가 먹는다. 조상께 제를 지내는 것이다. 벽이나 대문에도 팥 국물을 뿌린다. 악귀를 물리치는 주술적인 의미다. 팥죽은 밤참으로도 먹고 다음날까지 몇 끼를 먹었다. 초등학교 때 어느 핸가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안방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아 팥죽을 먹고 있었다. 왁자지껄 얘깃소리에 집이 들썩들썩 했다. 엄마를 부르며 부엌으로 갔다. 커다란 가마솥엔 팥죽이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예전 시골 인심은 그랬다. 뭐든 나눠먹는 풍습이었다. 떡을 해도 이웃집에 돌리고 제사를 지내면 다음날 동네 사람들을 불러 한끼 대접하곤 했다. 흔한 말로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고 뉘 집 어른 생일이 언제인 지 훤히 아는 열린 사회였던 셈이다.
겨울밤이 깊어간다. 먹색의 하늘은 천 길 우물 속처럼 아득하다. 인적 없는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애처롭게 빛난다. 갈 곳 없는 길 위의 인생들은 오늘밤 어디에서 견뎌낼까. 엊그제가 동지였다. 동지는 24절기 중 하나로 옛 사람들은 이 동지를 큰 명절로 여겼다. 동지는 해가 가장 짧은 날이다. 음기가 극에 달한 이 날,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죽을 쑤어 악귀를 물리치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태양을 맞이했다. 새해의 무사안일을 빌면서 이웃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으로 타인과의 단절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조상들은 역병이 창궐할 때도 팥죽을 쑤어 병마를 쫓았다. 나도 모처럼 동지를 맞아 팥죽을 먹었다. 식품회사에서 만든 팥죽이었다. 엄마의 팥죽과 보문산 절에서 먹은 기가 막힌 맛보다는 한참 떨어졌지만 힘겨워하는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먹었다.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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