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낙준 신부. |
20년째에 들어서면서 인간이 바이러스 세계에 진입하자마자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탐욕을 확장하는 길이 막히게 되고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탐욕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21세기의 첫 20년이 탐욕과 분노로 채운 시간이었고 이에 대해 탐욕을 채우고 분노로 타인을 배제하는 삶의 방식이 저주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성찰의 시간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꿈을 향해 달린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꿈이 아니라 저주의 세계를 향했다는 것입니다.
탐욕을 채우려는 것은 저주의 출발이었고 저주의 관계를 강화한 것이 우리들의 분노였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탐욕과 분노로 살 인간이 아닌 존재를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Alienus Non Diutius 알리에누스 넌 디우띠우스는 '인간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낯선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신은 인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경전을 통해 인간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갇혀 타인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지옥일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의 문을 연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지옥같은 세상에 살게 내버려 두었다는 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를 원리로 한 신자유주의를 위한 법이 21세기의 초반을 지배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맞게 정한 것이 법이라면 이제는 그 법이 탐욕과 분노를 사라지게 할 법으로 바꿔야 할 시간입니다.
서로를 배제하는 신자유주의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돌봄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21세기의 두 번째 20년의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탐욕으로 판단 받지 아니하고 분노로 심판받지 않기 원한다면 배제가 아닌 서로를 포용하는 돌봄 사회이어야 합니다.
직장을 잃고 고층빌딩 뒤편의 허름한 곳에서 절망을 수없이 마시는 사람들의 절망이 우리의 절망이어야 합니다.
또한 경쟁에서 생존하라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오직 당신이 필요하다는 동무인식이 필요합니다.
영혼 없이 지식만 확대하는 교육에서 법보다도 도덕을, 또한 도덕을 넘어선 이상으로 지혜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해야 합니다. 탐욕의 울타리를 높게 쌓은 벽돌을 내려놓고 사는 길이 분명하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탐욕과 분노라는 사랑이 아닌 모든 삶에서 벗어난 새로운 돌봄의 길이 우리 앞에 선 길이라고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전부로 살지 못하는 비참한 우리에게 사랑을 전부로 살게 하려고 21세기의 두 번째 2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과도한 감정표출의 절제없는 자기과시로 인간에 대한 예의없는 뻔뻔스러움이 우리를 지배했고,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가움과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 기도와 자신의 아픔이 깃들지 않은 희생으로 사는 어두운 밤으로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우리가 지배를 당했습니다.
이제 21세기의 두 번째 20년이 시작되는 시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그 출발을 우리가 가진 두 벌의 옷 중 하나는 헐벗은 이에게 주면서, 또한 먹을 것을 배고픈 이와 나누면서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돌볼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어디 혼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돌봄을 요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알리에누스 넌 디우띠우스!/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유낙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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