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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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키

남상선 / 수필가

  • 승인 2020-12-11 22:17
  • 수정 2020-12-11 22:23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다. '탈렌트 000는 키가 크고 참 예쁘다' 라든가 '000는 키가 작아서 장가가기 어렵게 생겼다'가 바로 그런 유이다. 키가 크고 작은 것에 관련 시켜 사람을 얘기한 것이다.

키는 '목 아래 키'와 '목 위의 키'로 말할 수 있다. 바로 앞에서 말한 두 사람의 키는 가시적인, '목 아래 키'이며 보통 우리 나이 17세 전후로 성장이 끝난다.

하지만 '목 위의 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평생 두고 커 나간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철수' 쪽에 해당하는 신장 150㎝ 의 작은 '목 아래 키'를 가진 사람이어서 숱한 조롱과 야유,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나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전후 시절을 비롯하여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무감각이 되다시피 그런대로 버티고 살았지만, 유별난 시선으로 조롱의 대상이 될 때에는 세상 살 맛을 잃은 뻔한 적도 있었다.

특히 대학 다닐 때, 저기 난쟁이 간다며 대학생이라는 게 초등학교 1학년생보다 작다고 야유하는 말을 해 왔을 때는 멘붕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대학생활이라는 게 고작 고학생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코피 흘리는 바쁜 생활이었다. 수면시간 부족으로 빈혈이 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키가 작아서, 별난 시선과 조롱, 멸시의 얘기까지 들을 때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 다 크는 키도 이리 작게 낳아 주셔서 이런 괄시를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부모님이 그렇게 원망스럽고 미울 수가 없었다.

또 결혼 적령기가 된 내 또래 청년들은 혼담 얘기로 수다를 떨고, 맞선을 보러 간다, 데이트를 하러 나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그런 얘기조차 뜸한 신세가 됐으니 키 작은 것이 은근히 스트레스가 되어 신세타령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어쩌다 나에 관한 혼담 얘기가 나와, 키 작은 것이 결격사유로 입질에 오를 때에는 왠지 나라는 자신이 그냥 싫어졌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밖엔 없었다.

그래 주변에 아무리 좋은 규수감이 있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키' 자만 나왔다 하면 그것으로 그 혼담은 없었던 것으로 묵살시켰다. 단신 약자의 노이로제가 아닐 수 없었다.

키가 작아 걱정하면서 부임한 초임지학교(덕산고)라 그런지 모든 것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교무실에 처음 들어가니 3학년 1반 교실 들어가면 염○○라는 학생이 있는데 처음 부임한 선생님들을 울려 먹는다는 귀띔을 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덩치 큰 학생들이 키 작다고 맞먹으려 덤비면 어쩌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겁이 벌컥 났다. 이제 올 것이 오는 가보다 싶었다.

교사 첫 발령 1교시 수업을 들어갔다. 교무실서 거론됐던 학생이 국어 문법문제 질문을 했다. 어렵지 않게 답변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을 다닐 때 하루 4파트나 되는 학생들을 지도한 이력 때문이었다. 4년 동안 중·고생, 영·수·국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다뤄보지 않은 문제집과 참고서가 없을 정도였으니, 그 정도 질문이야 문제가 되질 않았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이 맞은 편 창가에 앉은 이○○이라는 학생이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신출내기 교사를 골탕 먹이려고 두 학생이 짜고 하는 질문 같았다. 그 질문 역시 많이 다뤄본 문제라 어렵잖게 답변했다. 동시에 두 학생의 고개가 갸우뚱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희들 깐에는 어려운 문제라 답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순간 나는 같잖은 학생들의 기를 꺾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출석만 부르고 밤새 써서 외운 교안을 과시하듯 막히지 않고 내리 6칠판 정도 판서를 했다. 그 당시 칠판은 고정 칠판이라 키가 작은 나로서는 칠판 위 부분은 닿지 않았다. 칠판 절반밖에는 판서를 할 수 없었다. 학생 앉는 의자를 내오라 해서 그 위에 올라가 판서를 한 것이 장장 6칠판이었다. 단순 노동이라 그런지 팔이 빠지는 듯했다. 두 번째 시간 수업 들어가서도 출석만 부르고 판서로 시작해서 판서로 끝나는 수업이었다. 물론 6칠판 판서는 다 외워서 한 거였다.

학생들을 제압하려고 본때를 보이는 기죽이는 수업임에 틀림없었다.

그 이후로는 학생들의 어떤 질문도 없었다. 수업 반성을 해보니 학생 기죽이는 수업으로 성공은 했을지 몰라도 좋은 수업은 아닌 듯싶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이 달라진 것 같았다.

키가 작아 고심하던 내가 실력으로 학생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셈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일주일도 안 되었다.

모든 걸 제압하고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쾌승장군의 심정 그대로였다.

대학 다닐 때, 중·고생들 아르바이트하느라 공부한 내용과 암기한 작품들이 교안 없는 수업으로 동원되었다. 암기로 끌어낸 내용들이 키가 작은 교사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6개월이 지난 뒤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 교과서 없이 수업하는 선생님', 교과서와 모든 작품을 다 암기하는 '걸어다니는 사전'이란 별명으로 통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학교장 할애를 받아, 그 당시 전국의 명문고로 유명한 대전여고로 가게 되었고, 그것이 꼬리표가 붙어 다녀 39년 교직 생활 거의 모두가 할애 내신으로 학교 이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키가 작아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다. 심사숙고 끝에 대학 4학년 때 작심했다.

'목 아래 키'가 작아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왔지만, '목 위의 키'는 누구보다도 큰 사람으로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슴 따듯하게, 사람답게, '목 위의 키'가 큰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작은 키로 인정받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교사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다른 선생님들이 못하는 것을 나는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키가 작은 내가, 돋보이는 교사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고육지책이었지만 교사로서 내가 빛을 볼 수 있는 길은 다른 선생님들 교안 써서 하는 수업을, 나는 교안 없이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자니 모든 걸 외워서 교과서 한 권만 들고 들어가는 수업이어야만 했다.

대학 4학년 교생실습 나갈 때, 사대부고, 공주고등학교에서 교안 없는 수업 시연을 해 보았다. 수업 반응이 히트작이라 할 만큼 좋았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다른 선생님들 교안 쓸 때 참고서 문제집 8권 정도를 숙독하고 핵심 내용은 암기를 했다. 다음날 가르칠 교안도 작성해서 밤새 외는 것이었다. 수업 들어갈 때는 교과서와 출석부만 들고 들어갔다. 학생들 앞에 보이는 것은 교과서와 출석부밖에 없었지만 머릿속엔 밤새 외운 교안과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말만 교안 없는 수업이지 실제는 교안을 써서 밤새 왼 내용과 참고서 문제집 문제를 암기하고 정독한 것을 수업 내용으로 끌어내 해결하는 거였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만 잘 듣고 복습하면 참고서 문제집을 여러 권 다룬 효과를 거두는 수업이었다.

나는 '목 아래 키'가 작아 고민도 많이 했다.

거기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일쑤였다.

때론 갈등 속에 허덕이며 좌절하고 죽을 생각도 해 보았다.

작은 키를 비관하고 절망에 빠져 인생을 포기할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허나 결과는, 내가 키 작은 것이 나를 학생들의 기억 속에 남는 교사로 만들어 놓았다.

'목 아래 키' 작은 것이, 내가 작은 거인이란 소리를 들으며 살게 했다.

한 때 나는 '작은 키' 때문에, 비관도 하고 부모님을 원망도 했다.

이제 나는 '작은 키' 덕분에, 칭송받는 교사로 퇴임하여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목 아래 키'가 작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목 위의 키'가 크게 사는 것이다.

'목 위의 키'가 크게 사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답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온혈 가슴으로 가슴 따듯하게 사람 냄새 풍기며 사는 것이다.

아니, 개, 돼지 짐승 냄새가 아닌 사람 냄새로 사는 것이다.

계제에 우리도 '목 위의 키'가 몇 ㎝ 정도로 사람 냄새 풍겼는지 맥을 짚어 봐야겠다.

아니, 뛰는 심장이 냉혈 가슴은 아닌지 청진기를 얹어 보아야겠다.

'목 아래 키'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터널이 어둡지만, 나는 '목 위의 키'가 몇 ㎝로 맥이 뛰는지를 살펴 보아야겠다.

남상선 / 수필가

남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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