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미란의 세상읽기]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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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란의 세상읽기]세한도

  • 승인 2020-12-09 11:43
  • 수정 2022-07-06 12:30
  • 신문게재 2020-12-10 18면
  • 황미란 기자황미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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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황미란 칼럼사진
황량한 들판 위 초라한 집 한 채와 꿋꿋이 그 주위를 지키고 서 있는 고목나무 네 그루. 문인화의 정수로 꼽히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다. 지난 봄 소장자인 손창근(91) 옹이 201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해 보관해 오던 것을 박물관에 기증했고, 그 완전체가 14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극한의 고독을 거친 붓과 먹의 농담으로 간결하고도 처연하게 담아냈다.

환갑을 앞둔 늙어진 몸으로 제주도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1786~1856). '사회적 사망선고'를 받고 9년간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 가족도 만날 수 없었고 절친한 벗도 세상을 떠났으며, 초라해진 그의 신세에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하지만 제자 이상적(1804~1865)은 달랐다. 스승에게 책이 유일한 위안임을 알았던 그는 역관으로 중국을 드나들며 희귀한 서책들을 구해서 유배지로 보냈다. 제자의 변함없는 신의, 그 위로가 사무치게 고마웠던 추사는 수묵화 한 점을 그려 그에게 선물했다. 그림 속 노송은 추사 자신이요, 제자 이상적은 끝까지 푸르름을 간직한 잣나무였다. 작품의 길이는 원래 약 70㎝였지만, 청나라 문인 16명과 오세창, 정인보 등 조선 문인 4명의 감상평이 더해지면서 14m의 대작이 됐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기의 명작에 딱 꽂혀버린 사람들이 긴 댓글을 남긴 셈이다.

'세한'은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에서 따온 말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깨닫듯이, 사람도 어려운 상황이 닥쳐야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세한도'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은 파란만장하다. 1844년 탄생한 이 작품은 본래 주인인 이상적을 떠나 그의 제자 등 몇몇을 거쳐 일본인 후지츠카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추사의 작품에 매료돼 전공을 바꾸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예가 손재형이 현해탄을 건넜다. 1944년 미군 공습을 뚫고 후지츠카를 만난 그는 "원하는 대로 값을 치를 테니 세한도를 양도해 달라"며 사실상 백지수표를 제시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두 달 넘게 병석의 후지츠카에게 문안 인사를 하며 간청한 끝에 백기투항을 받아낸다. "한푼도 받지 않을 테니, 그저 잘 보존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한도'를 넘겨 받는다. 그 일이 있은 지 석달 만에 후지츠카의 집은 공습으로 잿더미가 됐다.



그러나 훗날 정치에 발을 들인 손재형은 극심한 자금난에 소장품들을 처분해야 했고, '세한도'마져 저당 잡혔다. 그렇게 국보 제180호는 개성 갑부 손세기의 가문으로 오게 되는데, 그가 바로 국민 품에 세한도를 안겨준 손창근 선생의 아버지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손 선생은 2018년 2대에 걸쳐 모은 국보·보물급 유물 300여점을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다. 하지만 딱 한 점, 자식보다 귀히 여겼던 '세한도'만은 기증서에 서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2년 후 다시 한번 큰 결단을 내린다. 손창근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금관문화훈장의 주인공이 됐다.

모니터 속 '세한도'를 더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희대의 걸작은 나지막한 소리로 충고한다. 이해득실에 따라 쉽게 맺어지고 또 끊어지는 인연들, 또 그 얕은 인간관계에 상처받는 우리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코로나에 점령당해 몸도 마음도 황량한 2020년 끝자락, 180여년 전 두 남자의 우정을 떠올리며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평생 모아온 자산을 조건없이 사회에 환원한 참 어른의 가르침에 방 한켠 내동댕이쳤던 적십자회비 고지서를 다시 집어든다. 편집2국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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