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아산고 교사 |
소처럼 일만 하셨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고 가난한 시절이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얘기는 여벌이었다. 아침 일찍 밭에 나가 점심도 거르고 일하시다 저녁 늦게 들어와 호롱불 앞에 앉으셨다는 할아버지는 마루 밑 고구마 굴부터 열 길이나 되는 우물까지 저울산 아래 전설을 닦아놓으셨다. 닭장을 지을 때는 흙벽돌을 손수 찍어 쌓아, 동네에선 최고의 닭장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닭장은 지금도 기억한다. 새벽부터 밭이며 마당귀를 쏘다니다 저녁이면 들어와 횃대에 올라앉은 어미닭과 수탉의 모습을 나는 뒷간을 갔다 오는 길에 꼭 확인하곤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벽장에 있었다. 동생과 숨바꼭질을 할 때면 나는 벽장에 숨기를 좋아했다. 동생은 키가 작아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느긋하게 누워서 동생의 항복을 기다렸다.
그곳에는 할머니의 살림살이를 담은 소쿠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책이 쌓여 있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대충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가만히 뒤적거리다 보면 소여물 같은 냄새 같기도 하고 발 고린내 같기도 하고 아버지 냄새 같은 것이 좋았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있던 것에 보태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고서적에 불과했다. 골동품인 샘이다. 20세기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는 한문 혹은 언문으로 되어있는 누렇게 빛바랜 서책을 뒤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논어 집주'다. 그걸 초등학생이 뜻도 모르면서 읽고 있었으니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새로운 역사를 집필하던 1970년대는 새마을 운동이 모든 것을 씹어 먹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기와지붕이 올라가고 전기가 들어오고 개화의 물결에 골골마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시대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뼈아픈 가족사다.
할아버지는 주경야독의 신화까지는 쓰지 못하셨으니 더욱 애닮은 일이다. 어쩌면 '내 생전에 저 책을 모조리 읽을 날이 있으리라.' 기약하며 하루를 더 옹골차게 사셨는지도 모른다. 그 서책에 대해서 할머니는 함구하셨다.
어쩌면 그것은 할아버지에게는 부적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또한 할머니는 버리지 못하신 것이리라. 물론 형편 좋은 가문에서야 훈장 노릇하며 글공부를 시켰겠지만 가난한 농군의 집안에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책은 벽장 속에서 먼지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교육은 다음 세대를 위한 기다림으로 자신을 벽장 속에 묻힌 서책처럼 생을 짊어지고 가신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뜻을 마중하는 마음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비록 21세기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며 골동품 같은 가르침이라도 고단했던 삶이 들려 주는 뼛속 깊은 이야기는 삶의 정수를 담는다. 오히려 교육적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공룡 발자국이며 고대 동굴벽화라는 점을 명심해라.
나는 지금도 그 낡은 서책을 보면 한 번도 생전의 모습을 뵙지 못한 할아버지지만 그 모습과 뜻을 생생히 마중하는 기분이 든다. 뜻과 기운을 마중하는 마음이 배움이라는 것을 다시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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