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 : 生(날 생) 命(목숨 명) 感(느낄 감) 應(응할 응, 대답할 응)
출 처 : 한국해학대전집 이인기인편(韓國諧謔大全集 異人奇人篇)
비 유 : 남을 살리는 선(善)한 일을 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복을 내린다.
우리 선조들은 전설적인 기인(奇人)들이 많다. 정감록예언서를 지은 분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 임지왜란 당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명당(四溟堂), 조선 중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인들이 정사(正史)나 야사(野史) 혹은 전설(傳說)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토정(土亭)이 언젠가 천안 삼거리에 위치한 한 주막집에 머무르게 된 적이 있었다.
마침 그 주막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한양에서 곧 있을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지방의 선비들이었다.
과거에 급제(及第)하기 위하여 공부해온 그들이라, 당대(當代)에 큰 학자이며 기인으로 명성(名聲)이 높은 토정선생의 방을 찾아가 한 말씀을 듣고자 모이게 되었다.
토정이 여러 젊은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 젊은 선비를 향해 이르기를 "자네는 이번 과거에 급제할 운이 없으니, 서운하겠지만 그냥 고향에 돌아가시게나"라고 하였다.
모두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민망해진 그 젊은이는 말없이 일어나 인사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는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 나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청천벽력의 말에 깜짝 놀란 그 선비는 멍한 느낌에 주막을 나와 대문 옆 담벼락에 등을 대고 쪼그리고 앉아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동안 과거에 급제를 목표로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 왔는데, 시험을 보기도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고향에선 나를 못난이라고 놀려댈 테고, 한편으론, 대학자이신 토정 선생의 말을 무시하고 과거를 보러 가서 정말 낙방이라도 하면 평소에 흠모해 온 토정 선생의 말씀을 우습게 아는 놈이 되는 꼴이 아닌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멀거니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침 수많은 개미 떼들이 줄을 지어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 바로 앞을 좌에서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좌측으로 눈길을 돌려 바라보니 그 뒤로도 끝없는 개미들이 줄지어 앞의 개미들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이 개미들은 어디를 향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몸을 일으켜, 그 선두에 선 개미를 보기 위해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가다 보니 선두개미가 있는 곳으로부터 불과 몇 발자국 앞에 큰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고, 그 독 안에는 물이 가득 차 금시라도 넘칠 듯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쓰고 버린 허드렛물이 배수 하수관을 통해 항아리에 떨어지게끔 되어 있었고, 물이 가득 차게 되면 자체의 무게로 인해 독이 기울어져 도랑 쪽으로 물이 쏟아지도록 만든 도구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가 부엌에서 물을 버리면 그 독이 기울어져 이동하고 있는 개미들에게 쏟아져 많은 개미들이 때아닌 물벼락을 만나 다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뛰어가 구정물이 가득한 독을 힘들게 옮겨 도랑에다 대고 얌전히 부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빈 독을 옮겨 제 자리에 갖다 두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개미의 긴 행렬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고 있었다. 개미의 이동을 넋 놓고 바라보던 이 젊은 선비는 한참 후 토정선생이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나, 조금 전에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가 쪼그려 앉아 다시금 우울한 생각에 잠겼다.
그 때 문득 "자네,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언제 나오셨는지 토정(土亭) 선생이 대문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니 선생께서 선비를 향하여 다가오다가 가까이 와서 젊은이를 보더니, 이번에는 토정(土亭) 선생이 흠칫 놀라며 이렇게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까 방에서 내가 낙방(落榜)을 할 운(運)이니 고향으로 내려가라 한 바로 그 젊은이가 아닌가?"
그리고는 토정 선생이 머리를 갸웃거리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가 조금 전에 자네에게 얘기할 때 본 자네의 상(相)과 지금 보는 자네의 상(相)이 완전히 다르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네. 얼굴에 광채가 나고 서기(瑞氣) 가 충천(衝天)하니 과거에 급제를 하고도 남을 상(相)인데,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상(相)이 바뀌었단 말인가?" 하고 물으셨다.
젊은 선비는 너무나 황당하여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선생께서 재차 물으시기를, "잠깐 사이에 자네의 상이 아주 귀(貴)한 상(相)으로 바뀌었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을 테니 내게 숨김없이 말씀을 해 보시게"라고 한다.
젊은이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리다가 문득, 항아리를 옮긴 일이 생각이 나서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선생께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고는 혼잣말로 말씀하시길,
'수백, 수천의 죽을 생명(生命)을 살리었으니, 어찌 하늘인들 감응(感應)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시더니, 다시 젊은 선비에게 이르기를, "자네는 이번 과거에 꼭 급제를 할 것이니 아까 내가 한 말은 마음에 두지 말고 한양에 올라가 시험을 치르시게" 하고는, 젊은 선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주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과연 이 젊은 선비는 토정(土亭) 선생의 말씀대로 과거에 응시하였고,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를 하였다 한다.
상(相)도 마음에 의해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마음 선(善)을 향해 써야 될 것이다. ?모든 생명체를 소중히 한다면 이로 인한 자신의 상이나 운명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작은 일이 이처럼 사람의 운명까지도 바꾸는 일은 많다. 특히 생명을 살리는 선(善)한 마음과 행동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선조들은 늘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착한 일(생명을 살리는 일)을 주창하고 솔선해왔다. 후손 된 자들은 마땅히 받들고 지켜야 할 의무감이 있는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삼불후(三不朽/인간이 살아가는데 썩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최상은 그 사람의 덕행이고, 그 다음은 그 사람이 일을 하여 공을 세우는 일이며, 그 다음은 그 사람이 남긴 학문과 저술이다. 비록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썩지 않는 것이라 한다. (上有立德.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雖久不廢.此之謂不朽 대상유입덕, 기차유입공, 기차유입언 수구불폐 차지위불후)
장상현/ 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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