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은 초시조차 보지 못하게 하는 등 관직 등용 금지가 법제화되기도 하고, 재산상속, 봉작, 제사 등 매사에 차별이 있었다. 제한된 품계로 등용하자는 한품서용(限品敍用), 일정 돈을 내면 신분이 바뀌는 서얼허통(庶孼許通) 등 조선 시대 내내 논의가 지속된다. 허통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18세기 말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 서얼 출신이 벼슬도 하고 이름도 얻는다. 갑오경장 이후 서얼 출신이 대거 고위직에 진출한다. 적서 논쟁이 끝난 것일까? 비로소 서얼 차별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제도가 바뀌어도 집단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암암리에 피해자가 된다. 문화의 속성이다. 마을에 혼담이 오갈 때면 서얼 이야기도 함께 오갔던 기억이다.
이런 신분 갈등은 고전의 주요 소재나 주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군담소설 '박씨전'은 가부장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을 영웅으로 등장시킨다. '홍길동전'에서는 서얼 출신 홍길동이 호부호형(呼父呼兄)조차 하지 못하는 차별에 가출을 결심한다. 신분을 타파하고 사랑에 성공하는 해피엔딩 '춘향전'의 춘향 어머니 월매는 기생이었다.
서얼, 자신의 선택과 무관한 굴레가 얼마나 황당했으랴. 같은 인간으로 모름지기 자신만 쓰일 장처가 없다니 얼마나 분했으랴? 형벌일까, 삭일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심상은 얼마나 깊었으랴? 냉대와 폄하, 가족과 이웃이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천애고아(天涯孤?) 처지를 얼마나 성찰했으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가슴앓이는 누가 알아주겠는가?
이인상(李麟祥, 1710 ~ 1760, 문인화가)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 후손이다. 1735년(영조11)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증조부가 서자였던 탓에 본과에 응하지 못한다. 서출이지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문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서화에 모두 뛰어나 후학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서체를 활용한 필법이 특기였으며, 그림 스승은 명확하지 않고, '개자원화전'에서 화법을 터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조와 강개한 성격이 그대로 투영, 담백하고 투명한 색감으로 멋과 단아함을 만들어낸다. 현감, 찰방 등 벼슬을 하긴 하였으나 늘 가슴앓이로 시달린다.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고 탐관오리의 부정을 참지 못하는 강직함 때문에 관찰사와 다투다 벼슬을 떠난다. 단양에 은거하며 시서화로 여생을 보낸다.
이인상, <검선도(劍仙圖)>1654년 이후, 종이에 담채, 96.7×6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등나무로 보이는 넝쿨이 타고 오른 노송과 비스듬한 또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그 앞에 긴 수염 휘날리며 검선이 정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옆에는 뽑다가 만 검이 노송 등걸에 기대어 있다. 장송은 도덕, 절개, 정의를 상징하지 않는가? 검은 냉혹한 양면성으로 엄단의 상징이다. 보는 이에 다르겠지만, 장진성 교수는 은일자(隱逸者)의 고고한 기상, 무욕(無慾)의 경지, 불의에 맞서고자 했던 고결하고 올곧은 정신, 세상의 온갖 타락과 오염에 물들지 않으려고 했던 결연한 의지를 그림 속에 투영하고자 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으랴. '서얼에 의한, 서얼을 위한, 서얼에 관한' 그림이란 주장이다.
예술 분야 중 소리가 가장 추상적이라 한다. 추상적일수록 감동과 확장성이 크다. 그림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언어나 몸짓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기에 공유 가능한 추상성을 부단히 추구하는 것이다. 암시와 상징도 추상성의 하나이다. 이인상은 모호성, 암시성을 그림에 활용한다.
편 가르기, 차별, 붕당은 분명 시대착오적 행태이다. 프레임을 씌우는 것 또한, 거짓과 차별화의 백미 아일까? 차별은 개인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국가를 역사를 아프게 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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