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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면서 점심메뉴로 뜨끈한 국물을 자주 찾게 되고 퇴근 즈음엔 노을이 이미 사라지고 없을 만큼 해가 빠르게 넘어간다.
어릴 적 이 무렵의 주택가 골목은 "찹쌀떡~"을 외치는 떡장수와 김장거리를 파는 리어카와 트럭장사꾼들의 호객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먹성 좋은 우리 삼남매는 그 소리들을 배경삼아 대문 앞을 서성거리며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곤 했다. 아버지가 가끔 과자나 붕어빵, 군고구마를 사들고 귀가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기다린 건지 '간식 봉다리'를 기다린 건지…. 퇴근하는 아버지의 얼굴보다 손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이 쏠렸다. 삼시세끼 흰쌀밥을 먹기도 쉽지않던 시절이어서 가뭄에 콩 나듯 접하는 달콤한 간식들은 한마디로 '행복'이었다.
이렇듯 동심을 설레게 한 붕어빵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포털의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그 유래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서양 음식들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와플은 큰 인기를 끌었다. 도쿄의 한 풀빵가게 주인은 주변의 와플가게 때문에 장사가 잘 되지않자 고민 끝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단팥을 넣고, 모양도 일본에서 '생선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하게 여긴 도미를 본따 만들어 팔았는데 이것이 '도미빵'의 시작이다. 도미빵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고, 1930년대에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도미 모양이 붕어 모양으로 바뀌어 현재의 붕어빵이 됐다.
붕어빵은 도입 초기에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1990년대 복고열풍에 힘입어 부활해 외환위기 속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대거 붕어빵 장사에 뛰어들면서 '붕어빵 르네상스'를 불러왔다.
당시 유동인구가 많은 시내는 열 걸음에 하나 이상의 붕어빵 노점이 있을 정도로 빼곡했다. 뿐만 아니라 버스정류장, 사거리, 아파트 입구마다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흔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단팥 대신 슈크림, 피자, 고구마 등을 넣거나 국화빵, 잉어빵, 계란빵 등 다양한 모양으로 진화도 하고, 단순 노점을 넘은 프랜차이즈까지 생겨났다.
주황색 비닐천막 속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붕어빵 노점은 바쁜 일상 속 추위를 피해 잠시 쉬어가게 하는 여유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사랑받았고 겨울의 대표적인 계절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얼마 전 붕어빵이 생각나 퇴근길에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면서 노점을 찾아봤다. 아직 완연한 겨울이 오지 않은 탓일까. 차로 15분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면서 두리번거렸지만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동네를 여러 날 헤맨 끝에 간신히 찾아낸 가게에서 붕어빵을 샀다. 가격은 세 개에 1000원. 계좌이체도 가능한데, 2000원부터 가능하다. 주인 말로는 요즘은 현금없이 카드만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현금이체로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가게 한쪽 구석에 적힌 계좌번호로 현금을 이체하고 나니 그제서야 붕어빵을 담아 주신다. 잘 팔리지 않아 다 식어버린 빵이라서 일까. 입보다 코로 먼저 맛보는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없이 먹는 빵은 예전 추억의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집에 가져와도 아이들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요즘은 그것들보다 맛있는 간식들이 넘쳐나니 붕어빵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몇 년 전 아이들이 아플 때 자주 가던 소아과병원 앞에 땅콩과자와 붕어빵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병원 대기실까지 침입한 고소한 냄새의 유혹에 못 이겨 자주 사먹고는 했다. 이른 아침 공복에 먹는 갓 구운 땅콩과자와 붕어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후에 이사를 하면서 거리가 멀어 그 병원을 가지 않지만 그때 맛있었던 기억에 해당 노점을 찾아간 적도 몇 번 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들렀을 때는 노점이 없어져 헛걸음을 했다.
추운 겨울을 달달하게 보듬어준 붕어빵 가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추억의 맛이 그립다.
현옥란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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