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저녁 먹고 출출할 때쯤 되면 아버님께서 고구마를 구워서 주신다. 단물이 줄줄 흐르며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군고구마. 어찌나 좋아하던지 밤마다 먹었는데 아침에 쟁반을 보면 고구마 껍질이 한가득 되었었다.
그 당시엔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목이 메이지도 않고 맛있었다.
예전에 시골에서는 일을 시키기 위해 소를 한 마리씩 키우셨는데 시댁도 그런 이유로 소를 한 마리 키우셨다. 저녁에 소죽을 쑤면서 불을 지핀 후에 고구마를 불 속에 넣어놨다가 밤에 꺼내서 주셨던 것이다.
39년 전쯤에 첫 아이가 3개월 되던 해에 남편이 하던 일 때문에 아이만 데리고 시골인 시댁으로 들어가서 1년 반 정도 살았다. 시댁 식구들은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고구마 농사를 짓지 않으셨지만 며느리가 고구마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님께서 바로 고구마 농사를 지으셨다.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시다.
그런 아버님을 나는 항상 좋아했다. 시댁은 논농사도 많으셨지만 특히 밭농사가 많으셨다.
그래서 어머님은 항상 바쁘셨다. 마늘 고추 깨 콩 등, 너른 들판이 거의 밭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철철 따라 바쁘셨다.
그 당시엔 집에서 막걸리를 담가 드셨는데 수시로 나는 막걸리를 걸러서 드려야 했다. 시부모님이 모두 좋은 분들이셔서 이웃들이 유난히 집에 놀러를 잘 오셨었다. 밭에서 일하시다가도 목이 마르다고 이웃이 오시면 나는 막걸리를 걸러 드렸고 시원하다 하시며 좋아하시고, 이 집은 며느리를 참 잘 얻었다 하시며 칭찬도 해주셨다.
한마을에 고모부 내외도 사셨는데 고모부께서도 유난히 술을 좋아하셨다. 집이 우리보다 뒤쪽에 있었는데 집에 오가실 때마다 수시로 나에게 오셔서 술을 달라 하신다. 그래서 나는 술 시중에 항상 바빴다.
추운 겨울에도 맨손으로 찬물로 술을 걸러야 해서 손이 빨갛게 되곤 했다. 밭으로 논으로 나는 시키지 않아도 술을 걸러 새참으로 잘 가져다 드렸었다. 그러면 일하시다 굉장히 좋아하셨다.
아버님은 소주를 좋아하셔서 내 용돈을 쪼개어 소주를 사다 드리곤 했다. 특별히 효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일하시다 목마를 때 단비처럼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시면 그것처럼 좋은 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런 추억을 만들 수도 없기에 가슴 속에 애잔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좋아하셨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1년 반을 살다 남편과 함께 객지로 나와 맨몸으로 자그만 가계부터 시작했다.
조금씩 돈이 모여 두 번째로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고, 양념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한 남편 덕에 손님은 끊이지 않고 장사가 꽤나 잘 되었다.
그 덕분에 시골집에 1년 비료 살 돈이나 리어카를 새 것으로 바꾸시라고 필요한 돈을 그때마다 부쳐드리기 시작했다. 시댁에서 도움받지 않고 밑바닥부터 시작했으나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온 덕분에 편하게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이 논에서 일하시다 쓰러지셨다고 연락이 왔다.
너무 놀란 우리는 식당 문을 닫고 시골로 가 아버님을 모시고 종합병원에 입원을 시켜드렸다. 아버님 사랑을 독차지 하던 며느리인 나는 이것저것 검사를 하는 동안 옆에 꼭 붙어 있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시켜 드렸다.
3일이 지나자 의사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집에서 편하게 지내시다가 하늘나라에 가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셨는데, 아파서 누워 계셨더라면 이해나 되지만 활동도 다 하시고 간경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 않으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엇다. 이제는 아버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도 있지만 집안에 기둥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원인은 힘들게 일하면 안 되는데 너무 무리를 하신 것이란다. 힘든 일은 다른 사람 시키라고 해도 본인이 계속해온 일이기에 남을 시키지 않고 추운데도 계속 논에서 일을 하시다가 무리가 와서 쓰러지신 것이다.
지금은 콤바인이다 트렉타이다 해서 기계 힘을 빌리지만 옛날에는 그런 기계가 없어서 몸으로 하는 일이 많았었다.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해서 우리집으로 모셨는데 한사코 집으로 가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시골로 모시고 갔다.
다행히 막내 시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어 아버님을 케어할 수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버님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식당 문을 계속 닫을 수가 없어서 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그 뒤로 6개월을 더 사시다 돌아가셨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화장실도 다니면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으셨다.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선산에 잠들게 하셨다. 그렇게 예뻐하시던 손자 손녀는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라 사람이 많고 음식을 만드는 걸 보고 무슨 잔치인 줄 알고 마냥 즐거워만 하는데 그 모습에 눈물이 더 서렸다.
혼자 되신 어머님은 그 뒤로 17년을 더 사셨지만 그중에 8년은 치매로 사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모셔서 모실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좀 더 잘 해드릴 걸 하고 후회가 됐다. 우리가 아무리 잘 해드린다 해도 부모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비할까!
지금도 군고구를 보면 아버님이 생각난다.
아버님의 달콤한 사랑이…….
그때가 그립다.
나영희 /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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