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Two Pepple 45.5x37.9cm, Oil on canvas 1979 |
한국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몸소 겪은 세대로써 잔혹한 인간의 본성, 참혹한 죽음의 현실을 겪었기에 그의 캔버스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형상화한 시대의 자화상이 엿보인다.
2015년 발간된 황 화백의 전기 『삶을 그리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일그러진 인간을 그리는지 알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그림이 나온 시기가 전쟁과 이산 등 모든 것이 희망이 없는 암울한 시대였다는 점이다…(생략)…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면 그 이상의 비극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의 표현마저 빼앗겼다면 사람은 한낱 상자 속에 놓인 꼭두각시 이상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러한 숙명이 나의 가냘픈 자유의 절규로 화(化)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올해 89세. 화가에게 나이는 무색하다. 황 화백은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그의 모든 것을 빼앗기도 했고, 그림의 근원이기도 한 한국전쟁은 올해 꼭 70주년이 됐다. 이 시점에서 제18회 이동훈미술상 본상 수상은 진실로 인간을 탐구하고 있는 황용엽 화백을 위해 준비해둔 선물은 아니었을까.
1998년 대전시립미술관 개관 기념 기획전시 '2000 시대정신'에서 작품을 대전 시민과 처음 만났던 황 화백은 22년 만에 이동훈미술상 수상을 위해 지난달 29일 대전시립미술관을 직접 찾았다. 황용엽 화백 그리고 최영근 이동훈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선승혜 대전시립미술관장과 나눈 대담을 정리했다. <편집자 주>
황용엽 화백 |
황용엽 화백:나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3년제인 평양미술학교 2기로 입학했다. 그곳은 사회주의리얼리즘만을 추구해 표현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지만, 인물 위주의 철저한 기초 교육을 받은 것이 화가로서의 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다. 미술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남으로 내려왔다.
최영근 이동훈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참 어렵고 혼란했고, 두려웠던 시기였을 것 같다.
황용엽: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상상을 초월하니까. 어떻게 그런 세계가 있을까. 나는 남으로 19살에 피난을 왔다. 내가 올해 여든아홉이니까 북한에 대해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이북을 잘 아는 사람, 한국전쟁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선승혜:전쟁은 요즘 사람들은 마주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다. 선생님의 그림은 그 시대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나.
황용엽:화풍이 10년 주기로 바꿨다. 90년대와 지금은 또 다르다. 내가 죽으니까 상대방을 죽여야 하고, 처절한 상황, 동족끼리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나는 다른 걸 그릴 소재가 없었다. 사람만 그리다 보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려왔다. 한때는 민화로, 샤머니즘으로 한때는 극한으로 변형하며 그려왔다. 최근에는 70년대와 비슷한 화풍으로 단순화해서 그린다. 물론 그려놓고 보면 마음에 안 드는 날도 있다.
인간 human 130.3x97 1982 |
황용엽:내가 겪어온 삶을 글로 쓴다면 많은 소재가 될 텐데, 그림은 설명이 안 된다. 나름대로 어떻게 이 굴곡진 역사를 소화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해 왔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오랜 세월 그림을 그려온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완벽하지 못하다. 노력만 해 왔을 뿐이다.
선승혜:완벽하지 못하다 말씀하시니 겸허해진다. 예술가의 길은 참 어렵다.
황용엽:젊은 시절 박수근과 이응노 선생에게 조금 배웠다. 두 분 모두 시대가 낳은 사람이다. 나는 박수근 선생님과 고흐가 같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독학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었다. 박수근 선생도 어렵게 사셨는데, 물감이 없으니 다른 대체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화강암에 새기듯 그려진 그림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거다.
최영근:예술적 승화는 어려운 주제다. 사람은 사람을 증오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좋아하고 미워도 한다. 어느 순간 승화로 가기 위한 내면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황용엽:지금도 하루의 7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운동도 좋아해서 지금도 테니스를 친다. 운동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체력이 겨우 받침이 된다. 내면의 힘은 결국 체력 아니겠는가. 피카소의 200호가 넘는 대작을 보면 이걸 얼마 만에 그렸을까, 하루에 그렸나 하는 느낌이 온다. 이건 이 사람의 체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카소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권투도 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10시간을 하면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은 20시간을 그렸던 거다. 역시 체력이 있어야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꾸민 이야기 affected story 45.5x37.9 1998 |
삶이야기 life stort 97x130.3 1998 |
황용엽: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그림은 자꾸 그리다 보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려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헤게모니'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추상화 경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잘 이해 못했다. 나는 사실적인 묘사를 할 수 없고, 추상화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그릴 수밖에 없었고, 나만의 그림 세계로 지금까지 오게 됐다. 1989년 제1회 이중섭미술상이 제정되면서 첫 수상자가 됐다. 그때 나이가 58세였는데, 인생 첫 수상이었다.
최영근:10년 주기로 작품이 변했다. 시대의 변화가 보인다.
황용엽:어떤 해는 지우고 싶은 것도 있다. 이런 그림은 주변에서 볼 수가 없으니까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잘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젊었을 때는 외국에 안 나갈 때니까, 파리 초청장 받아서 홍보실에 제출했는데 왜 가겠느냐고 하길래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그래도 도장을 안 찍어줬다. 어렵게 아는 분의 도움으로 1979년 처음으로 파리에 갔다.
열심히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아하, 여기서는 내가 화가로 생존하기 어렵겠구나 싶어 6개월 만에 돌아왔다. 책으로만 공부하니까 카테고리를 찾기 어려웠는데 실제로 미술관을 돌며 다녀보니까 어느 정도 맥이 잡히더라. 그 후 나만의 것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옛날 것도 다시 그려보곤 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해미 기자, 선승혜 대전시립미술관장, 최영근 이동훈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황용엽 화백. |
황용엽:우리나라 절실한 것은 아직 못 본 것 같다. 우리 세대에서 그런 문화를 통해서 많이 나왔으면 영향이 갔을 텐데 아쉽다. 그때만 해도 화단은 국전 중심이어서 모델과 꽃, 풍경을 그리는 인상파가 주였다. 인간을 다루는 그림은 그때도 지금도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살아온 시대의 흔적이다.
큰 틀로 보자면 아직도 문화정책이 미술과 동떨어져 있다. 앞으로는 미술도 팝, 트로트도 고급문화가 되길 바란다.
황용엽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일기'라 부른다. 그림을 그리면서 확실한 형태의 모습을 못 그리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화백의 말은 결국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그리운 것들, 두려웠던 일들, 선명하면서도 흐릿한 많은 것들을 그렸다 지우며 남은 그림 위의 흔적이다.
"그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89세 황 화백의 고백은 덤덤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낀다. 황 화백이 줄곧 걸어온 인간의 길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주어진 길에서 탄생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제18회 이동훈미술상 본상 황용엽 화백의 특별전은 2021년 만날 수 있다.
정리=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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