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생경한 사진 한 장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서울 강서구의 1000가구 아파트 단지에서 딱 두개 나온 전세 매물 중 하나를 보려고 9팀 10여명이 집 앞 복도에 길게 늘어선 모습이었다. 9팀 중 계약을 원하는 5팀이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한 뒤 제비뽑기로 전세 계약자를 선정했다는 후일담이다.
이 기사를 접한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국감에서 "사진 속 매물은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된 집으로 다른 집보다 전세가가 1억원 이상 저렴했다"고 해명했지만 사상 초유 '제비뽑기 전세'의 파장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새 임대차법 소급 적용으로 인한 집주인과 세입자와의 분쟁은 임대차 3법을 직접 만든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 다주택자 논란을 피하기 위해 매도하려던 경기도 의왕 아파트가 기존 세입자의 갑작스러운 전세계약갱신청구권 행사로 거래 불발 위기에 처했고, 전세살이 중인 서울 마포집은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퇴거를 요청하며 새 전셋집을 알아봐야하는 처지가 됐다. 결국 의왕집 세입자에게 집을 빼주는 조건으로 위로비를 챙겨줬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한 나라의 경제수장이 자신이 만든 법에 묶여 전셋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고 하니 국민들 눈에는 '개콘' 보다 더 재밌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로또 청약
"얘들아, 나 됐어!" 이른 아침부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한 친구가 신도시 요지에 들어서는 아파트 청약 당첨소식을 알렸다. "고생 많았다" "인생 역전" "부자 등극" 축하메시지가 쏟아졌다. 친구의 당첨소식에 나도 덩달아 기쁘고 흥분 돼 일이 손에 안잡힐 정도였다.
결혼한 지 10년쯤 된 친구는 무주택자로 오랜 기간 전세살이를 했다. 올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위해 내 집 마련을 생각하던 친구다. 생애최초 특별공급에 지원해 비인기 타입 대략 4대 1 경쟁을 뚫었다는데, 친구는 무주택자에게 청약 기회를 대폭 넓힌 이번 정부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동시에 '로또 청약'을 없애려는 정부의 움직임 전 막차 로또이기도 한 셈이다. 외벌이 남편과 아이 둘을 키우며 알뜰살뜰 살림을 해온 친구에게는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으리라.
한 친구는 "지금 그 지역 시세가 ○억인데 앉아서 ○억 벌었다"고 친절하게 계산까지 뽑아준다. 여기서 등장하는 ○억은 평범한 월급쟁이가 평생 저축해 일군 자산과 맞먹는 규모다. 한편으론 부모세대가 열심히 일해 모은 재산보다 자녀세대가 청약에 당첨돼 얻는 시세 차익이 수배, 수십배 많다는 비현실적 상황이 우리가 바라던 '공평한 세상'이 맞는 건지 씁쓸해진다. 가만히 있으면 가난해지는 자본주의 현실 속에 근로소득은 점점 가치를 잃어가는 모습이다. 청약을 위한 무주택 '존버'만이 부자가 되는 공식이 되고, 갈수록 높아지는 청약가점 커트라인은 세태를 반영한다. 노력보단 운빨, 청약 당첨이 로또가 되어버린 요지경 세상에 가수 나훈아처럼 묻고 싶다. "테스형, 인생은 원래 한방인거야?"
이은지 편집2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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