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맹수로 알던 호랑이나 사자도 새끼를 잃는다. 자신조차 스스로 건사하지 못하기도 한다. 절대 강자는 없다. 승패 결과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놀랍게도 전투력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 육식동물은 없다. 코끼리, 코뿔소, 하마, 기린, 야생 소 순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덩치를 키웠을까? 하나같이 덩치가 크다. 사자, 하이에나, 들개 등은 숫자 싸움을 벌인다. 협동 공격, 서로 역할 분담도 한다. 사회성으로 우위를 점한다.
사람은 한없이 나약하다. 여타 영장류와 다르지 않게 손발 사용이 자유롭고, 지능이 뛰어나며 민첩한 장점이 있긴 하다. 혼자는 살지 못한다. 게다가 잡식성이다. 다른 동물과 싸워 이겨야 한다. 가지고 있는 상대적 장점과 사회성 덕분에 오늘이 있다.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을 사회성이 좋다고 하며, 그런 사람을 마당발이라 하기도 한다. 강점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한정 사람을 사귈 수는 없다. 한 명이 맺을 수 있는 최대 인간관계는 몇 명이나 될까? 옥스퍼드 대학 로빈 던바(인류학자, 디지털 전문가) 교수가 세계 여러 부족을 조사했더니, 부족 평균 주민 수가 153 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인원을 150명이라 주장한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 한다. 진정한 관계 형성의 최대 한계라며, 그 이상이 되면 나누는 것이 낫다고 한다. 전투를 위한 최적 인원 역시 150명, 집단을 관리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도 150명, SNS를 통해 맺을 수 있는 친구 역시 150명 남짓이라 주장한다. 정확한 기억의 한계 수치라고도 한다. 이중 진정한 친구는 삼사 명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중요한 하나가 심신의 접촉이다. 그것도 주고받기요, 쌍방향이다. 계산적이지 않은 듯 점잔 빼도, 서로 회계(會計)한다. 누구나 손해 보기 싫어한다. 어떤 언행이 일방적으로 지속 되면, 결국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단절된다. 따라서 크든 작든 어떤 표시를 한다. 공감 표시, 반응이 클수록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SNS에서 '좋아요' 눌러 주거나 댓글 달아주기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원숭이 이 잡아주기도 지혜로운 관계유지 방법의 하나라 한다. 실제 이 잡기도 하지만, 그저 흉내만 내는 관계유지 행동이기도 하단다. 사람도 이 잡기를 했다. 양지녘에 앉아, 웃통 벗어부치고 이 잡는 광경이 다반사였다. 이가 얼마나 번성하고 일상화되었던지, 구석구석 빈틈없이 모두라는 의미로 '이잡듯' 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는 숙주인 포유동물 털에 기생하며 피를 빨아먹고 산다. 사람에게 기생하는 것으로 몸이, 머릿니, 사면발이 3종이 있다. 다른 질병을 매개하기도 하고 가려움증으로 다른 질병을 유발하거나 감염시키기도 한다. 고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출현이 꽤 오래되었으나 번식력이 강한 탓인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과밀하고 위생이 불량한 환경에서 만연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환경도 많이 개선되고, 퇴치 방법의 발달로 간단하게 구제할 수 있다.
이인문 作 '나한문슬(羅漢?蝨)', 18세기, 종이에 담채, 41.5×30.8cm, 간송미술관 |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동갑내기다. 둘은 기량이나 격조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독창성에서 단원에 뒤진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인문은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으나, 특히 송림 그림에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당시는 글짓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가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림 주문이 쇄도하고 매매가 활성화된 탓이리라. 글씨 전담 서예가가 탄생한 것이다. 이인문 화첩의 화평이나 시는 모두 유한지(兪漢芝, 1760 ~ 1834, 조선 문신, 서예가)와 홍의영(洪義榮, 1750 ~ 1815, 조선 문신, 서예가)이 썼다.
그림 좌하에 홍의영이 쓴 화제가 있다. '짙은 눈썹과 흰머리 아무 집착도 없다네(?眉皓首無住著)' 두보(杜甫, 712 ~ 770, 중국 당나라 시인)가 읊은 「희위언위쌍송도가(戱韋偃爲雙松圖歌)」 중간쯤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 전체를 형상화하기보다, 무소유(無所有) 속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소요유(逍遙遊)에 시구(詩句) 하나 차용하여 얹은 듯하다. 자연과의 소통에서 나아가 하나 된 모습, 한없이 편안하며 청량(淸凉)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과 사람도 그러하면 얼마나 좋으랴.
양동길/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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