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 報(갚을 보), 恩(은혜 은), 緞(비단 단), 洞(고을/ 마을 동)
출전 : 성호사설(星湖僿設), 열하일기(熱河日記) 청구야담(靑邱野談) 등에 보인다.
비유 : 한번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인간의 가치 있는 "삶"에 대한교훈.
유사성어 : 결초보은(結草報恩), 백골난망(白骨難忘) 등
한양 광통방(廣通坊)안에 보은단동(報恩緞洞 / 지금의 서대문구 미동)이 있으니 곧 역관(譯官/번역 및 통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홍순언은 젊어서 불우했으나 호협(豪俠)하고 의기(義氣)가 있었다. 그는 역관으로 젊었을 때 명(明) 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으로 가다가 통주(通州)에 이르러 청루(靑樓/창녀, 창기를 두고 손님을 맞아 영업하는 집)에서 노닐고 싶어 수백 냥의 은을 가지고 기생촌(花房)에서 제일가는 명기(名妓)를 찾았다. 드디어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생김생김은 절세가인이지만 어찌 소복(素服)을 하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홍순언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본래 절강(浙江) 사람이며 아버지가 연경(燕京)에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는데, 돌연 돌림병에 걸려 두 분이 동시에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 권장(權葬/임시 매장)하여 두었습니다. 그러나 졸지에 혼자된 몸으로서 고향으로 모셔다 장례(葬禮)를 치를 비용이 없어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례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홍순언이 묻기를,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순언이 그 여자를 가엾게 여겨서 곧 장례비용을 물으니 3백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가지고 있던 전대를 풀어서 비용을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靈柩)를 모시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깨끗이 가지고 돌아가 장례를 치른 다음 사족(士族) 가문으로 시집가거라. 내가 만일 네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것을 준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하였다.
여자가 성명을 물으니 조선의 사신으로 성(姓)이 홍(洪)이라는 말만하고 이름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은혜에 감명하여 뼛속 깊이 새기며 홍순언이 준 은(銀)을 팔아서 반구(返柩)하여 장사를 잘 치루었다.
그 후 그 여인은 명나라의 정권실세 석성(石星)의 첩이 되었고, 나중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지금의 차관)인 석성의 계실(繼室/본부인을 상처하면 본 부인이 됨.)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자신이 직접누에치고 손수 비단을 짜고, 비단 첫 머리에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하고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홍순언이 오는가를 탐문하였다. 그러나 홍순언은 귀국 후 연경에서 공적인 여비를 기생촌(妓生村)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옥(獄)에 갇히게 되었고. 옥고를 3년 동안 치른 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조선 건국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가계(家系)를 시정해달라고 명나라에 주청하기위한 특별사신)따라 다시 명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다.
이들 일행이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밖을 바라보니 화려한 장막(帳幕)들이 구름에 닿을 듯한데,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판사(洪判事)를 찾으며 말하기를 "예부시랑 석성공(公)이 홍판사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영접하러 나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계집종 10여 명이 떼를 지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공이 놀라 피하려 하니 석시랑이 말하기를 "군(君)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히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크게 위안이 됩니다."하였다. 부인이 홍순언을 보고 곧 꿇어앉아 절하므로 공이 부복하여 굳이 사양하니 석시랑이 말하기를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군에게 절하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의 장례를 잘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으니 어느 날엔들 잊었겠습니까?"하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고 부인이 잔을 잡고 올렸다. 그 때 석성은 예부시랑(禮部侍郞/제향, 조회, 학교, 과거담당 차관)이 되어 있었는데 종계변무사의 처리업무는 곧 그가 맡아하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일을 처리하였다.
홍순원 일행은 석시랑 덕분으로 드디어 그 어려운 임무수행을 잘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압록강을 건너려는데 사람이 와서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禮單) 보은단(報恩緞) 수십 필과 기타 진귀한 물품을 수없이 받들어 드리며, 홍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두고 갔다. 홍순언은 부득이 그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그가 준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이란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홍순원이 집에 돌아갔을 때 비단을 사려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이르렀고, 사람들은 그가 살던 동리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불렀다. 그리고 홍순언은 나라의 중요한 큰일을 성공적으로 이룬 공(功)으로 광국훈공(光國勳功)에 책정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知中樞) 벼슬을 받았다.
후에 임진왜란 때에는 석성이 병부상서(兵部尙書/지금의 국방부장관)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후 주청(奏請)하는 병력, 병기,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극진히 돌보아주어서 우리나라의 재조(再造)의 공적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인 내조(內助)의 공에 힘입은 바가 컸다. 지금은 보은단동이 잘못 전하여 미동(美洞)이라 한다.
은혜에 보답함은 '인간 삶'의 가치 중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延促由於一念 寬窄係之寸心 故機閒者 一日遙於千古 (연촉유어일념 관착계지촌심 고기한자 일일요어천고) 意廣者 斗室寬若兩間(의광자 두실관야량간) - 菜根譚 -
길고 짧음은 한 생각에 달려 있고, 넓고 좁음은 한 치 마음에 매어 있다.
그래서 마음이 한가로은 자는 하루해를 천 년으로 여기고, 뜻이 넓은 자는 비좁은 방도 하늘 땅 사이처럼 넓게 생각한다. 채근담에 있는 말이다.
하루살이는 다음날 일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내일을 생각할 수 없고, 또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내일의 일 뿐 아니라 천년 후의 일도 생각하며 사는 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장상현/ 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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