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 충남대 교수 |
그런데 꽃의 매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찬란한 꽃도 시들지 않는 꽃은 없고, 찬란해서 더욱 시듦은 아쉽다. 대신 꽃이 진 자리엔 열매가 영글고, 이듬해 열매는 다른 꽃으로 부활한다. 이렇게 꽃은 꽃 자체의 찬란한 생명 절정을 찬탄케 할 뿐만 아니라, '순환하는 생명'을 시적으로 육화한다. 그래서 꽃은 '순환하는 생명'을 대표하는 은유가 되나보다.
지난 주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루이스 글뤽도 자주 꽃을 은유로 순환하는 존재의 차원을 열어낸다. "야생 붓꽃"을 통해 글뤽은 "뻣뻣한 흙 속에 묻힌"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야생 붓꽃의 생명을 찬탄한다. 글뤽은 꽃의 목소리로 말한다. "내 고통의 끝에/문이 있었어." 꽃은 이미 죽음을 경험했고, 죽음 끝에서 다른 생의 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내 생명의 중심으로부터/거대한 분수가 솟구친다. 짙푸른 빛으로" 붓꽃은 부활한다.
순환하는 생명! 그리하여 현대인에게 꽃은 이미 까맣게 잊혀진 고대의 시간관을 환기시키는지도 모른다. 고대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고 믿었다. 고대인에게 인간 종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었을 터, 자신의 관점이 아닌 대자연의 관점에서 시간을 파악했음직하다. 어차피 의식의 여명기, 인간 자아와 자연의 구분은 지금처럼 확고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대자연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계다. 수명이 길어봐야 120년을 넘기 어려운 인간 생명체의 차원에서 시간은 시작해서 정녕 끝장나는 "화살"일 수밖에 없지만, 고대인이 대자연과 대우주의 시간차원에서 시간을 인식했다면, 필시 시간은 순환으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과거-현재-미래는 동일선상에 놓였을 것이다. 관점과 차원이 문제다.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면 새로운 시간 차원이 열린다. 1977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일리아 프리고진은 "시간이 거꾸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시간의 순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단서가 붙어있기는 하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은 충분히 긴 시간에서만 가능하고, 닫힌 체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생애와 역사를 넘는 대자연의 우주 시간 속에서는 시간은 가역적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은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뱀을 숭배했고, 나날이 모양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믐의 죽음을 너머 초생달로 부활하는 달을 신성시했고, 죽은 듯 동면한 후 새끼를 거느리고 나타나는 곰을 숭배했다. 뱀과 달과 곰이 '순환하는 대자연'을 대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더 이상 고대인의 상징을 숭배하지 않는다. 고대를 지나 어느 시기부터 시간은 탄생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로 여겨지게 된다. 그 변환의 시기는 문자의 발명, 가부장제의 발달, 종교적으로 여신이 남신으로 교체되는 시기와 맞물린다고 한다.
현대인은 뱀-달-곰 대신, 무의식 깊숙이 각인된 고대인의 순환적 시간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에 투사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꽃에 매혹되고, 꽃을 숭배하는 것이 아닐까. 꽃에 대한 매혹은 개체로 영생하려는 미이라의 뻔뻔한 탐욕과는 다르다. 꽃은 피고 지는 생명의 부침과 순환, 죽어도 다시 사는 큰 차원의 역설을 깨닫게 하는 매개인 까닭이다.
김명주 충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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