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
하늘 좀 봐요/ 바다가 누워 있어요// 고래 몇 마리 소풍을 떠나는 파랑길/ 눈이 부십니다// 바람에/ 몸을 떨던 숲/ 산호초로 붉어지면// 그대/ 머물 섬 하나 없는/ 남빛 하늘//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 하나/ 철썩이는 파도 되어// 한세월/ 뭍이 된 그대// 끝내/ 한몸 될/ 저 하늘과 바다// 가물거리는 편린의 조각/ 기어이/ 사랑의 설화 품을까// 그런데/ 어쩌자고 눈물은 찬란한가. 졸시 '가을, 어쩌자고' 전문
그랬습니다. 가을하늘은 군자의 마음처럼 티 없이 맑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혹의 바람으로 북적였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굳게 닫힌 박물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래등 같은 고분들은 자막 방송의 무성언어였습니다. 역사에 숨겨진 무상한 세월의 한켠, 어느 왕비의 무덤이었던가, 아니면 아릿다운 공주들의 환생인가. 화려한 파스텔톤 핑크뮬리의 고백이 팜파탈의 치명적 유혹으로 서성이는 감탄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핑크뮬리는 미국이 원산지이며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우리말로는 분홍쥐꼬리새라고 부르지요. 2014년 제주도 휴애리 자연생태공원에 처음 식재되었으나 이후 순천만 국가정원, 경주 첨성대, 대전 수목원 둥이 핑크뮬리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환경부가 정한 생태계 교란 위해성 2급으로 분류되었음에도 이미 가을 인증샷의 대명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자 전국의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현재 12만㎡ 군락지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여기에다 개인이 조성한 군락지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그 규모는 더 크지 않을는지요.
그래도 달뜬 마음을 켜켜이 일으켜 세우는 몽환의 감성은 가을바람으로 빛나고 가을을 작별하는 잎새들이 허공의 삶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있습니다. 가을의 의태어로 낙엽 지는 소리가 그득하게 다가와 허공의 삶은 아름다웠노라고 숨막히는 찰나의 밀어를 건넵니다. 그래요 귀를 기울이면 보이지 않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요. 소리란 사람, 공간,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소리는 인간이 듣고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는 말은 주파수 대역이 없지만 사람들은 세상에 듣기 좋은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합니다.
밝은 밤 달빛이 누각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정철, 1536~1593) 온산 가득찬 붉은 단풍에 먼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심희수, 1548~1622) 새벽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을 거르는 그 즐거운 소리(유성룡, 1542~1607)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이정구, 1564~1635)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이항복, 1556~1628) 또한 김광균 시인(1914~1993)은 설야(雪夜)에서 눈 내리는 밤의 적요를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 하였지요.
그러는 사이 시골밤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합니다. 도란도란 거리며 밤새워 가을야행을 즐길 작정인가 봅니다. 하현달이 빼곳이 고개를 내밀고 어스름 달빛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많은 날이었습니다.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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