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미 차장 |
시보다는 소설을 좋아했고, 소설을 사랑했다. 책을 사도 시가 아닌 소설을 고르던 편식쟁이인 내가, 시집을 읽는다.
소설은 유영하는 파도 같다. 빠르면 하루에도 읽히지만 어떤 책은 두어 달이 지나도 한 장 넘기는 일이 그렇게 어렵고 두렵다.
소설이 좋았던 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하소설이 아닌 이상 일정 분량은 맞춰야겠지만,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가상의 공간에서 퍼즐처럼 완벽한 시나리오에 따라 흘러간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 장을 미리 읽는다. 누군가는 스포일러를 미리 봐도 되느냐고 하지만, 끝을 알고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꽤 즐겁다.
앞으로도 소설을 읽는 것을 게을리할 생각은 없지만, 이제는 시집에도 조금은 마음을 주기로 했다.
시는 말을 아낀다. 왜 그렇게 시인들이 시를 쓰며 고통스러워했는지 이제 조금 알겠다.
단어 하나에, 문장 하나에도 수많은 비밀을 숨겨놨다. 그리고는 '당신의 뜻대로 읽으십시오' 하고 무심히 건네는 것이 시다. 시는 마음과 가슴을 동시에 파고드는 힘이 있다. 소설의 끝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이라면 시의 끝은 쿵 하고 내려앉는 뭉클함, 저릿함이다.
시는 잠을 설친 밤에 읽기 좋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시인이 알 턱이 있겠냐만은 시 한 줄에 위로를 받는다. 좋은 시는 오래오래 감정을 컨트롤 하는 세포에 새겨지나 보다. 아마 시인의 뼈를 갉아먹고 태어났기 때문에 읽는 독자의 몸 어딘가에서 생명력을 키우는 거겠지.
생각 없이 읽어 내린 시 구절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사람, 그때의 햇살, 그날의 기분처럼 툭 하고 터져 나와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
지난 주말 내내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워진 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너는 짧은 글조차 부끄러움 없이 썼는가, 그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채근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는 것 또한 몸 어딘가에 새겨졌던 시가 생각이 나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윤동주 '별헤는 밤'
나의 고민은 시 한 줄에도 눈 녹듯 사라지고, 소설 주인공처럼 과감한 내일을 꿈꾸며 사그라 든다. 각자 품은 고민의 무게는 다를지 몰라도 그 해답은 영원히 사람을 노래하고, 사람의 힘으로 쓰여진 문학에 있다고 믿는다.
어떤 날은 막힘없이 풀리는 소설처럼 살고 싶다. 그러다 어떤 날은 시처럼 툭 던져지는 삶이 되고 싶은 것처럼.
이해미 경제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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